방송통신심의위원회(위원장 박만)가 23개 웹툰을 폭력성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지정하려고 하면서 반발이 커지고 있다. 해당 웹툰 만화가들을 비롯한 만화계 인사들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법적 소송까지 준비 중이다.

웹툰 청소년유해매체물 지정 사태 어떻게 벌어졌나?

방송통신심의위는 지난 7일 다음, 네이버, 파란 등 웹툰을 연재하고 있는 포털에 '청소년유해매체물 결정 관련 사전 통지 및 의견 제출 안내'라는 공문을 내려보냈고, 이에 포털들은 방송통신심의위가 지정한 23개 웹툰 작가들에게 청소년유해매체물 지정에 앞서 의견 진술을 할 것을 전달했다.

방송통신심의위 관계자는 "지난달 7일 웹툰 '열혈초등학교'가 논란이 된 후 집중모니터링과 신고를 통해 23개 작품을 폭력성이 짙은 만화로 선정했다"면서 "일부 작품에서 청소년 인격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흉기 등을 이용한 잔혹한 살상 장면 등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것이 확인돼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하기 앞서 행정절차법상 사전 의견 제출 기회를 부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방송통신심의위는 이달 말까지 해당 웹툰 작가들의 의견을 듣는 절차를 진행하고 3월 중 통신심의소위원회에 안건으로 올려 청소년유해매체 지정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최종 지정되면 여성가족부가 작품과 작가를 공표하게 된다.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지정되면 19금 딱지가 붙게 되고 성인인증 절차 없이는 페이지에 접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해당 웹툰에 대한 광고도 할 수 없다.

 

만화계는 이번 방송통신심의위의 조치에 대해 즉흥적이고 자의적인 심의 기준을 잣대로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뿐 아니라 만화계 산업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대한 사태로 규정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지난 연말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으로 학교 폭력이 사회 문제로 논란이 되고, 언론들이 폭력의 원인으로 게임과 만화 등을 지목하면서 시작됐다.

특히 조선일보가 지난 1월 '열혈초등학교'의 폭력성 문제를 1면에 지적하자 이틀 뒤 방송통신심의위는 열혈초등학교를 포함한 웹툰에 대해 집중 모니터링에 돌입하면서 논란이 확대됐다. 실제 열혈초등학교를 연재한 야후 코리아 측은 작가에게 통보한 후 해당 콘텐츠를 웹에서 삭제하기까지 했다. 

방송통신심의위 조치는 만화계 죽이기

만화계는 이번 사태에 대해 1997년 청소년보호법 제정 이후 한국 만화 시장이 타격을 입은 것에 버금갈 정도로 ‘만화계 죽이기’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만화계에서는 지난 1997년 청소년보호법 제정 이후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묶어 '1997 체제'로 통칭하고 있다. 1997년 체제는 청소년보호법 제정 이후 성인만화에 '19금 구독불가'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오프라인 만화 산업 전반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음란폭력성조장매체공동대책시민협의회는 스포츠신문 편집 관계자와 해당 만화가들을 고발해 대거 기소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서점주인들은 성인만화를 청소년에게 팔 경우 청소년보호법에 걸리는 위험을 막기 위해 아예 성인만화 매대를 치워버렸다. 90년대 성인만화계는 이현세, 허영만, 윤태호 등의 작가를 낳으면서 황금기를 맞이했지만 1997년 청소년보호법 제정 이후 수익성이 떨어지면서 성인만화잡지가 폐간되고 성인만화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만화시장은 웹툰이란 방식을 통해 다시 꽃피게 된다. 음란과 폭력의 원인으로 지목돼 사장 단계에 있었던 만화가 온라인을 통해 웹툰으로 태어나면서 새로운 시장을 연 것이다.

만화계는 이처럼 어렵게 시장을 연 만화 시장이 이번 방통심의위의 조치에 따라 '1997 체제'로 돌아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웹툰이 하나둘씩 청소년유해매체물로 판정을 받게되면 단순히 19금 딱지가 붙고 성인 인증을 거쳐야 하는 절차를 마련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청소년유해매체물로 판정을 받으면 해당 웹툰은 법령에 따라 고지가 되고 일체의 광고 등이 금지되면서 매출 역시 절반 수준으로 감소되는 등 사실상 만화 시장에서 퇴출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현재까지는 웹툰이 포털로 유입되는 트래픽 증가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지정되면 포털로서는 트래픽 감소를 감수하면서까지 성인인증 절차를 마련해야 될 뿐 아니라 혹여 청소년보호법 위반이 되는 골치 아픈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아예 성인만화의 웹툰 연재 코너를 없애버리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작가들은 '착한 만화'를 그리지 않으면 수익을 얻지 못하고, 연재 공간을 얻기 위해 자기 검열까지 해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만화가협회와 우리만화연대, 웹툰 작가들이 꾸린 방심위심의반대를위한범만화인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상대책위원회)는 "인터넷 발달과 더불어 새로운 형식으로 등장해 10년간 발전해 온 웹툰이 다시금 수많은 대중문화에 원천 소스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이번 방심위의 유해매체물 지정으로 다시금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다"면서 "오프라인 시장의 궤멸을 일으켰던 1997년의 상황을 다시 겪으리라는 예측이 기우가 아니다"고 밝혔다.

청소년보호법 개정이 해답

이번 방통심의위가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지정을 검토하고 있는 웹툰 중 15개 작품은 이미 작가들 스스로 19세 미만 구독 불가 조치를 걸어놓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번 조치 이면에 방통심의위의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비상대책위원회는 "웹툰은 이미 오래 전부터 혹시 모를 청소년을 향한 부정적 영향을 고려해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19세 미만은 볼 수 없는 성인 인증 절차를 거치는 시스템을 마련해 오고 있다"면 "하지만 방심위는 사회적 인식과 이미 마련되어 있는 시스템, 그리고 작품의 내용/맥락적인 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고 비판했다.

더구나 의견 제출 통보를 받은 웹툰 중에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주관, 수여하는 ‘2011 대한민국 콘텐츠 어워드’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수상작인 <더 파이브>와 ‘2011 오늘의 우리만화’ 수상작 <살인자○난감> 뿐 아니라 새로운 표현 양식으로 해외까지 소개된 <옥수역 귀신> <봉천동 귀신> 등이 포함돼 있다. 이미 작품으로서 인정을 받거나 영화화까지 되고 있는 작품들이 폭력성이 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위질을 당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또한 방통심의위의 심의는 방송통신위원회의설치운영에관한법률과 시행령에 근거하고 있지만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지정할 권한은 명시돼 있지 않아 법적 하자 논란도 예상된다.

'학교 폭력 사건→웹툰 원인 지목→-방통심의위 청소년유해매체물 지정'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청소년보호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만화계에서는 지난 1998년 이현세 작가가 그린 <천국의 신화> 사태 당시 법적 논란을 들어 청소년보호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천국의 신화>를 그린 이현세 작가는 작품의 성적 묘사의 선정성을 이유로 미성년자보호법 위반으로 벌금 300만원을 선고 받았다. 이에 이현세 작가는 불복해 항소했고, 2심에서 결국 무죄판결을 받게 된다. 2002년 헌법재판소도 미성년보호법에 규정된 불량만화 조항이 지나치게 추성적으로 돼있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문제는 위헌 결정을 받은 미성년보호법의 내용이 고스란히 청소년보호법의 심의 조항에 남게 됐다는 점이다.

서찬휘 만화컬럼니스트는 "청소년보호법의 심의 조항에는 위헌판결을 받고 사라진 미성년보호법 내용 자체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저 '불량만화'가 '청소년 유해매체'로 바뀌었을 뿐"이라면서 "이번 사태는 지난 1998년 미성년자보호법을 통해 자의적으로 불량만화의 기준을 판단한 것이 위헌 판결을 받았음에도 청소년보호법으로 바뀐 이후 15년 동안 그대로 이어져 오면서 사단이 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만화계 오프라인 직접 행동에 법적 소송까지

이번 조치가 만화계 전체 산업의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커지면서 만화계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법적 소송까지 검토하는 등 강력 반발하는 모습이다.

방심위심의반대를위한범만화인비상대책위원회는 27일 방통심의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청소년유해매체물 지정을 취소하고 만화가와 독자 앞에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비상대책위는 또한 변호사를 선임해 이번 조치가 법적인 하자가 있다는 의견서를 방통심의위에 제출하고 공청회를 열어 작가들과 이번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했다.

백정숙 우리만화연대 부회장은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해달라고 별도로 연락하지 않았는데도 70여명이 나올 정도로 작가들이 이번 문제를 표현의 자유 문제와 자기의 생존의 문제로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만화스토리작가인 전진석씨는 자신의 트윗에서 "이런 아침에 만화가들이 일어나서 움직인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일로 작가들이 얼마나 크게 분노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온라인에서도 일명 '노컷 운동'으로 불리우는 서명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서명운동은 http://nocut_toon.blog.me에서 진행 중이며 방통심의위의 이번 조치를 비꼬는 웹툰 작가들의 작품도 올라와 있다.

웹툰 <스틸레인>의 제피가루 작가는 "혹시 아이가 있는 만화가라면 아이 보고 절대 어디 가서 부모님 만화 그린다는 소리는 못하게 하세요"라며 "청소년유해만화나 그리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만화가의 아들, 딸이 되어 왕따를 당할 수도 있거든요"라고 비꼬았다.

비상대책위원회는 끝내 웹툰이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지정되면 법적 소송까지 불사한다는 계획이다. 백정숙 부회장은 "방통심의위의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이의신청부터 시작해서 행정가처분금지신청과 같은 법적 수단을 내부에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인하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심의철폐, 창작의 자유, 볼 권리 확보, 자율등급쟁취'라는 글을 통해 "영화계의 경우 스크린쿼터를 조금 줄이겠다고 하자 모든 영화인들이 똘똘 뭉쳐 저지에 나섰다"며 "우리 만화계가 이번 사태에 똘똘 뭉쳐 이번 방심위 심의기도와 청소년유해매체물 지정의 문제를 알리고 나아가, 1997년 체제의 문제를 공론화시켜 자율등급제를 가져온다면 웹툰 청소년유해매체물 사전통지가 한국만화 부활과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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