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방송에 명예복직한 고 이재학PD의 사원증이 그의 납골함 앞에 놓여있는 모습. ⓒ미디어오늘
▲청주방송에 명예복직한 고 이재학PD의 사원증이 그의 납골함 앞에 놓여있는 모습. ⓒ미디어오늘

2020년 2월4일 CJB청주방송 이재학PD가 “억울해 미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13년간 청주방송 프리랜서로 일하다 동료의 열악한 임금에 문제 제기한 뒤 해고당했다. 그의 죽음으로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소리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 후 2년, 방송사 노동 환경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9일 전국언론노동조합‧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공동주최한 ‘이재학PD 2주기 추모 토론회’에서 김유경 노무사(돌꽃노동법률사무소)는 △중앙노동위원회, MBC 부당해고 방송작가 2인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 최초인정(2021.3.19.) △고용노동부, 청주방송 특별근로감독 결과 프리랜서 12명 노동자성 인정(2021.4.26.) △청주지법, 고 이재학PD 노동자성 인정 판결(2021.5.13.) △고용노동부, 지상파 3사 근로감독 결과 방송작가 152명 노동자성 인정(2021.12.30.) △대법원, 대전방송 불법 파견 MD 직접고용 시 기간제 채용 위법 판결(2022.1.27.) 등을 의미 있는 사건으로 꼽았다.

방송통신위원회는 2020년 12월, 허가 기간이 만료된 162개 지상파 방송국의 재허가 공통조건으로 △방송사별 비정규직(계약직, 파견직, 프리랜서 등) 인력 현황 및 근로실태 파악을 위한 자료를 매년 4월 말까지 방송통신위원회에 제출할 것 △비정규직 처우 개선 방안을 마련하여 재허가 이후 6개월 이내에 방송통신위원회에 제출하고 그 이행실적을 매년 4월 말까지 방송통신위원회에 제출할 것을 부여했다. 역사상 최초였다. 제대로 집계조차 되지 않던 방송사 비정규직 규모와 임금 체계, 불합리한 노동조건이 드러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모두 이재학PD의 죽음에 빚진 결과들이었다. 

▲9일 전국언론노동조합‧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공동주최한 ‘이재학PD 2주기 추모 토론회’ 모습. ⓒ정철운 기자
▲9일 전국언론노동조합‧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공동주최한 ‘이재학PD 2주기 추모 토론회’ 모습. ⓒ정철운 기자

그러나 변화는, 여전히 더디기만 하다. 김한별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장은 “지난 2년간 값진 판정이 많이 나왔지만 현장에선 달라진 게 없다고 한다. 부당해고 당사자들은 소송과정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 지노위·중노위·행정소송까지 사실상 5심제 속에 당사자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견디고 있다. 생계를 위해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어 “KBS는 작가들의 개인 책상을 없애고 공용 책상을 주는 식으로 근로자성을 지우기 위한 액션을 취하고 있다. 전보다 불편해졌다는 작가들도 있다”며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이용우 변호사(민변 노동위원회 부위원장)는 “고용노동부가 지상파 3사에 근로감독 시정 기한을 연장해주고 있다. 내일(10일)이 연장 기한 마지막 날이지만 (방송사들이) 무시할 가능성이 높다”며 “무늬만 프리랜서를 유지하는 방송사는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지상파가 방통위에 제출한 비정규직 현황과 처우 개선 방안은 현재까지 외부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강은희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대법원은 20년 전인 2002년 드라마 제작현장 스태프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고 판단했지만 드라마 제작현장 비정규직이 근로계약서를 체결하는 비율은 여전히 20%대에 머물고 있다. 현장은 마치 법과 무관한 무법지대처럼 보인다”면서 “드라마가 끝날 때마다 채용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 불안정한 노동환경과 (위장)프리랜서 신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임을 노동자가 증명해야 되는 현행 법 제도의 한계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현장 정착의 장벽”이라고 지적했다.

▲고 이재학PD 사망 이후 방송 비정규직 관련 주요 사건 일지. ⓒ김유경 노무사 정리 
▲고 이재학PD 사망 이후 방송 비정규직 관련 주요 사건 일지. ⓒ김유경 노무사 정리 

그러나 분명 더디지만, 변화는 있다. 김유경 노무사는 “최근 방송 비정규직들에 대한 판결, 판정 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키워드는 ‘방송 프로그램 제작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유기적으로 협업하는 업무의 특성’”이라며 “애초부터 방송 프로그램 제작 업무는 작가, 아나운서, VJ, 그래픽 디자이너, MD 등이 독립적으로 따로 떼어내어 수행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다. 방송 비정규직에게는 필연적으로 ‘사용자에게 종속되어 일할 수밖에 없는’ 업무 특성도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무늬만 프리랜서’는 이제 방송계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김유경 노무사는 “대전방송에서 파견노동자였던 분이 불법 파견으로 판명 난 이후 기간제로 채용된 것에 대해 대법원이 ‘직접고용’ 의무가 발생해 기간제 채용이 위법하다, (대전방송이) 파견법 취지를 왜곡했다며 의미 있는 판결을 최근 냈는데 향후 방송계에 미치는 파장이 클 것”이라고 전망한 뒤 정규직 노동자를 향해 “프로그램 제작 인력의 30~4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제대로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개별 노동자들이 법률 투쟁 결과로 ‘나는 노동자’라는 판정과 판결을 받고 있지만 언제까지 개별투쟁으로 가기가 쉽지 않다”면서 “결국 해결 주체는 방송사”라고 강조했다. 

김유경 노무사는 “방송사는 과거 2~3명의 정규직이 하던 일을 비정규직에 떠넘기는 과정에서 프리랜서 무늬를 덧씌웠다. 무늬만 프리랜서인 노동자들은 프리랜서 낙인 때문에 노동법상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다”고 지적한 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고용 불안에 정규직과의 임금 격차와 차별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정규직이 묵인하는 분위기 속에서 문제는 심화됐다. 지금 비정규직들의 주장은 지금껏 빼앗겼던 몫을 뒤늦게 요구하는 것”이라며 방송사에 근본적 성찰과 인식의 전환을 요구했다.

현장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멈추지 않을 계획이다. 김한별 지부장은 “방송 비정규직들은 다른 직군의 비정규직들과 분명 차이나는 특수성이 있다. 나는 근로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스태프들도 있다. 정규직 전환이나 조직, 근로감독 대응에 대해 조금 더 세심한 접근 방식이 필요했다는 것을 뒤늦게 성찰한다”면서 “결국 조직적 힘이 필요하다. 노조로서 힘을 가져야 임금 인상 및 처우 개선에 더해 근로자성 인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적극적인 행동을 예고했다. 그는 조직화에 ‘미디어노동공제회’가 좋은 출발이 될 거라 전망했다. 

이용우 변호사는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근로기준법에 명시하고, 차별시정제도를 실질화 할 필요가 있다. 방송사 표준계약서는 형식적으로 꾸민 위탁계약서가 아니라 실제 일하는 노동관계의 실질을 담았는지 수시 점검이 필요하다”며 법‧제도의 변화를 주문했다. 또 “방통위가 재허가 시 고용 건전성에 대한 평가 항목을 반드시 마련하고 방송산업의 여러 의제 논의 테이블에 방송사 비정규직을 대표할 단체의 참여를 의무화하는 것도 대안”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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