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 정치'에 취한 언론
[2010 언론의 자화상 (하) - 지방선거 보도]민심 속뜻 외면·섣부른 판세 단정 참담한 선거보도, 반성은 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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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일 오후 6시를 예고하는 방송 진행자 초읽기가 끝나자 TV화면을 뚫어지게 지켜보던 한나라당 지도부 표정은 흙빛으로 변했다. KBS, MBC, SBS 등 ‘방송 3사’ 지방선거 출구조사 결과는 ‘오세훈 47.4%, 한명숙 47.2%’로 나왔다. 여당의 서울시장 선거 완승에 대한 기대는 무너졌다. 언론은 선거 당일까지 서울을 초박빙 승부는커녕 접전지역으로도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충격이었다.
언론은 지방선거 투표가 진행되기 이전부터 ‘한나라당 승리’를 단정했다. 보수신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MBC 뉴스데스크는 5월 27일 메인 뉴스 제목을 <수도권, 한나라 ‘초강세’>로 뽑았다. △서울시장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 50.4%, 한명숙 민주당 후보 32.6%) △경기도지사 (김문수 한나라당 후보 44.7%, 유시민 국민참여당 후보 32.6%) △인천시장 (안상수 한나라당 후보 44.2%, 송영길 민주당 후보 32.9%) 등 방송 3사 마지막 여론조사 결과를 전했다.
방송이 공동으로 전한 여론조사 결과대로라면 선거는 해보나 마나였다. 한겨레도 5월 28일자 1면에 <선거 D-5…‘한나라당 쏠림’ 가속>이라는 머리기사를 전했다. 언론의 섣부른 판세 단정은 될 사람 밀어주자 심리인 ‘밴드웨건’ 효과를 유도하고 야권 지지층 투표의지를 꺾을 수도 있었지만, 언론의 확신에 찬 보도는 계속됐다.
선거 당일 아침까지도 언론의 민심 읽기는 철저히 실패했다. 경향신문은 6월 2일자 1면 기사 제목을 <시·도지사 6곳 접전>으로 뽑았고, 인천 충남 충북 경남 강원 제주를 접전지역으로 분류했다. 서울과 경기는 접전지역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방송사가 한나라당 승리를 사실상 단정했던 서울의 개표 결과는 오세훈 47.4%, 한명숙 46.8%로 0.6%포인트 차이 초접전이었고, 경기 역시 김문수 52.2%, 유시민 48.8%로 나타났다. 언론이 접전지역에서 제외했던 서울과 경기는 모든 광역단체장 선거구 중 최대 접전지역이었다. 언론이 접전지역으로 꼽았던 6곳은 모두 야권에서 승리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 MBC 보도에서 알 수 있듯 보수·진보 언론을 막론하고 민심 읽기에 실패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선거보도의 문제점을 보수언론의 ‘한나라당 띄우기’로 단정짓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한나라당 승리 가능성이 높다는 보도를 쏟아냈던 언론들은 6월 3일 아침 전혀 다른 제목의 기사를 1면에 실었다.
조선일보는 ‘한나라 완패’, 동아일보는 ‘여 예상 밖 참패’, 중앙일보는 ‘민주당 대승’, 경향신문은 ‘한나라 패배’, 한겨레는 ‘이명박 정권 심판’이라는 제목을 뽑았다.
언론의 민심읽기 실패는 ‘여론조사 정치’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여론조사는 ‘한나라당 승리’ 전망을 전달하기 바빴다. 언론은 여론조사 신빙성 확인에 앞서 중계보도에 앞장섰고 결과적으로 최악의 선거예측 결과를 빚어냈다.
언론은 여론조사가 바닥민심을 담지 못했다면서 책임 전가를 시도했다. 정치가 여론조사에 휘둘린 것은 분명하지만, 바닥민심 실체를 분석해 국민에게 ‘팩트’를 전하는 것은 언론의 몫이다. 언론은 지방선거 예측실패에 대한 처절한 반성도, ‘여론조사 정치’ 폐해에 대한 대응책 마련도 소극적이었다. 언론의 자성을 촉구한 언론인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충재 한국일보 편집부국장은 6월 5일자 칼럼에서 “일부 언론은 부동층이 막판 견제론 쪽으로 쏠렸기 때문이라며 애써 책임을 회피하려 하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라며 “유권자에게 왜곡된 정보를 제공해 투표에 혼란을 끼친 점은 뼈저리게 자성해야 할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여론조사 정치’의 폐해는 현재 진행형이다. 청와대는 검증되지 않은 이명박 대통령 ‘국정운영지지도’ 고공행진을 근거로 국정운영 강공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여론조사 정치 폐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2012년 19대 총선과 대선에서도 언론의 엉뚱한 선거판세 전달은 계속될 수 있다.
김창룡 인제대 언론정치학부 교수는 “한마디로 부끄럽다. 언론이 타성에 젖거나 권력 눈치 보기에 급급해 외부상황 변화와 민심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했다”면서 “한국은 여전히 여론조사 맹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외국은 여론의 흐름이나 추이를 조사하는 데 쓸 뿐인데 한국은 지나치게 가치를 부여한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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