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3세 감독이 빚은 가부키 세계, 日 흥행 1위 앞둔 이 영화

[박꽃의 영화뜰]

2025-11-19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 영화 ‘국보’ 스틸컷

“지금 이 순간 네가 너무 부러워. 네 피를 들이마시고 싶을 정도야.” 

일생일대의 대형 가부키 무대 데뷔를 앞둔 ‘키쿠오’(요시자와 료)가 극도의 긴장으로 몸을 벌벌 떨며 말한다. 오랜 시간 함께 연습해 온 친구이자 경쟁자인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는 자신은 얻지 못한 기회 앞에 선 그를 조금은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지만, 그 마음을 짐짓 숨긴 채 솔직하게 독려한다. “넌 재능이 있잖아.”

핏줄로 상징되는 ‘가문’의 힘이냐, 그걸 넘어설 압도적인 ‘재능’의 힘이냐. 일본전통 문화의 상징이자 고급 예술의 정수와도 같은 가부키를 소재로 한 일본 영화 ‘국보’ 이야기다. 지난 6월 일본 현지에서 개봉해 무려 1200만 관객을 불러 모았고, 역대 실사영화 흥행 1위인 ‘춤추는 대수사선 극장판 2’(2003) 기록을 20여 년 만에 뛰어넘을 채비를 마친 참이다. 애니메이션이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독식하는 게 일상적인 일본 영화계에선 무척 이례적인 성공이다.

▲ 영화 ‘국보’ 스틸컷

‘국보’가 다룬 것은 에도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가부키의 세계다. 화려한 복장과 과장된 화장, 정교한 신체 동작과 기교에 가까운 음성, 때로는 시적이고 한편으로는 노골적이기도 한 문장들이 한데 모여 인간 삶의 희로애락을 묘사하는 종합 무대 예술이다. 그 연기를 누구보다 잘 해내고 싶은 ‘키쿠오’(요시자와 료)와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의 우정, 질투, 실패와 성장을 전면에 내세운 ‘국보’는 가부키 전문 배우의 삶과 희비를 깊이 있게 그린다.

무려 세 시간에 달하는 상영시간에도 ‘국보’가 일본에서 수많은 관객을 끌어들인 이유라면 아마도 명성 대비 진입장벽이 높은 실제 가부키의 상황 때문일 것이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부담스러울 만큼 긴 시간, 좋은 자리는 20만 원에 달하는 비싼 입장료, 중장년층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이미지 등 가부키를 경험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낮지 않다. 이 점을 알고 있다는 듯 ‘국보’는 배우들이 연기한 가부키 극의 제목, 등장인물, 서사에 대한 짧고 쉬운 설명을 곁들여 이해를 돕는다. 주인공에 젊은 스타 배우 요시자와 료를 낙점한 건 물론이다. ‘언젠가는 봐야 할 것 같던’ 가부키를 향한 대중의 입장을 영리하게 읽고 만족시킨 셈이다. 

▲ 영화 ‘국보’ 포스터

가부키에 대한 관심이 일본인만큼 크지 않은 해외 관객에게도 ‘국보’가 매력적일 수 있다면 이유는 좀 다른 데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이 예술에 삶을 투신한 인간 군상의 고뇌를 깊이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가부키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전통적으로 ‘가문’이다. 그 집안 핏줄을 타고난 자가 대대로 이어지는 이름과 연기 스타일을 세습한다. 그 자격을 갖춘 게 ‘슌스케’라면, ‘키쿠오’는 패망한 야쿠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견습생이다. 재능은 있되 그걸 뒷받침해 줄 뒷배가 없는 처지다. 그러나 운명은 어느 한쪽에게도 영원한 권세를 몰아주지 않아서, 우세와 열세에 번갈아 놓이던 두 인물의 시간은 덧없이 흘러간다. ‘국보’의 백미는 그 덧없음마저 예술의 일부라는 듯 마지막까지 고고하게 연출되는 ‘키쿠오’의 가부키 시퀀스일 것이다.

한국 관객에게는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이 작품을 연출한 이상일 감독이 일본 니가타 현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 3세라는 점이다. 초·중·고등교육을 모두 조선학교에서 마친 그는 지금껏 한국 이름으로 활동해 왔다. 19일 ‘국보’ 개봉을 앞두고 지난 13일 내한 기자회견에 참석한 그는 자신을 “문화적으로 일본 영향을 받은 한국인”이라고 소개했다. 이 감독은 그간 아오이 유우 주연의 코미디물 ‘훌라 걸스’(2007)와 츠마부키 사토시 주연의 스릴러물 ‘악인’(2011)으로 일본 아카데미상 다관왕에 오르며 일찍이 입지를 다졌고, 이번 ‘국보’로 올해 칸영화제에 초청됐다. 가부키라는 일본의 전통문화 세계도 이상일이라는 재일3세 감독의 이름도 영 낯설게 느껴지는 우리 관객이 많을 테지만, 곧 개봉하는 ‘국보’가 알고 보면 여러모로 재미를 느낄 법한 이력의 작품이라는 점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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