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정도령은 없다
[곧은소리]
-두둑하게 솜 둔 버선, 가죽신 신고/ 서리 밟고 나가 저물어 돌아오네/ 연두색 긴 두루마기 땅을 휩쓸고/ 진홍색 부채 펴면 하늘을
가릴만/ 한권 책 겨우 읽고 율(律)을 떠벌리고/ 천금 재물 탕진하고 돈 쓸 궁리만/ 권문세가 찾아가 종일 굽실 굽실/ 시골사람 만나면
의기양양하네.
평생 삿갓을 쓰고 방랑하며 풍자가 넘치는 시를 남겼던 김병연(金炳淵·1807∼1863)은 19세기중반 부패한
양반들을 이렇게 비웃었다. 그는 홍경래의 난(1811년)때 적군에 항복해서 대역죄인이 된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익순의 손자였다. 그래서 벼슬을
단념하고 평생 떠돌이 지식인으로 살아야했다.
이러한 유랑지식인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하나의 사회적인 세력을 이루게 됐다고 한다.
몰락한 양반이나 천첩소생 또는 상민들로 일정한 생계기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글을 팔아먹고 사는 무리였다.
이들 사이에서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언하는 <정감록>이 나타났고, 영조 15년(1739)에는 "<정감록>을 불태워 금지하자"는 주장이 논란됐다는 기록이
<왕조실록>에 처음 나타났다(백승종교수·서강대).
조선왕조의 멸망과 정씨 성을 가진 메시아의 출현을 예언하는
<정감록>은 이 나라, 이 민족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마다 널리 읽혔던 것 같다. 1960년대에 필자가 수집한 <정감록>은
모두 일제강점 하에서 출판된 활판본이다.
계룡산에 정씨 성을 가진 구세주가 출현하리라고 말하는 <정감록>의 예언은 말세에
메시아가 재림하리라고 이르는 기독교의 가르침과도 같다. 그것은 고난을 헤쳐나가야 하는 인간의 가장 간절한 소망이다.
집권야당 지배하의 악몽 6년
6년 넘게 날이면 날마다 정치적 극한 상황 속에서 살아야했던 오늘의 한국사람도 메시아의 출현을 갈망해야할 만큼 위기를 감내해 왔다. 그동안
한나라당은 김대중 정부에 의한 정권교체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았고, IMF사태라는 국가적 재앙을 불러들인 책임도
모른척했다.
한나라당은 오히려 이른바 '옷로비의혹'으로부터 시작해서 김대중 정부를 부패정권으로 몰아붙여 4년 전 총선에서 원내
제1당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정권교체 이후 6년, 16대 총선 이후 4년 동안 한나라당은 집권야당으로 군림해왔다.
집권야당이
지배해온 그 6년은 악몽과도 같은 위기의 연속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폭로정치'가 판치고 전 세계가 지지했던 6·15공동선언을 '특검전술'의
제물로 삼았다.
전대미문의 마피아식 차떼기로 그 자신의 탄핵받아야할 한나라당은 거꾸로 노무현대통령을 탄핵하는 정치적 테러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한나라당은 김대중정부 때에도 '김대통령 탄핵'을 거론한 적이 있었다. 그 야망을 이룬 것이다. 그나마 탄핵소추안은 구체적
사실이라기 보다는 노무현대통령을 윽박지르는 정치적 선전문구를 나열한 것이었다(3월17일자 '3당연합 광란의 탄핵' 제하의
본란).
경상도 지역감정으로
기사회생
그래서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 3당연합이 탄핵안을 밀어붙이자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수직 추락했고, 6년에 걸친 집권야당의
권력은 무너지는 듯 했다. 그러나 지난 15일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비록 원내 제1당의 자리는 내놨지만, 탄핵안통과 직후의 위기와는 거리가 먼
121석을 차지했다.
총선진행 과정에서 신문들은 "국회의원선거는 대통령선거와는 달리 지역대표를 뽑는 선거"라고 주장했고, 많은
교수들님도 그렇게 주장했다. 이들은 "정책경쟁 없는 선거"를 비판·비난했다. '정책경쟁'은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나 이번 4·15총선은
대통령탄핵이 핵심을 이루는 헌정 반세기사상 초유의 선거였음을 이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바꿔 말해서 집권야당 6년을 심판하는 선거였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위기에 직면했던 한나라당이 기사회생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박근혜 대표를 앞세운 경상도 지역감정전략의 결과였다. 동시에
'차떼기'와 탄핵을 쟁점으로 삼지 못한 열린 우리당의 선거전략실패에 큰 책임이 있다.
열린우리당 152석, 한나라당 121석이라는
총선결과를 두고 다수 여당과, 여당을 견제하는 야당을 바라는 유권자의 뜻이 반영됐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이번에도
'과거청산'의 여망이 좌절됐다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또 한번 깨닫게 된다. 구세주 정도령은 계룡산이 아니라, 오직 좌절을 거부하는 유권자의
마음 속에 있다는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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