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로 하자는 말이 무서운 이유

[바심마당] 김은희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정치사법화는 정치의 자기부정

2015-08-16     김은희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그저 살아내기에도 가혹하게 고단한 세상, 힘없는 이들에게는 억울한 일 넘치는 시절이다. 어렴풋이 희망을 기대하며 마음 눅여 버텨내다가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으면, 그 때는 맞서 싸운다. 아니 싸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있는 힘을 다해 대항 해본들 시작부터 가진 힘이 서로 다른데 쉬이 바라는 결과를 얻어낼 리 만무하다. 그 마지막에 바지가랑이 붙잡고 매달리는 심정으로 찾는 곳이 법원이다. 누구든 솔로몬의 재판이나 판관 포청천을 기대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법관의 ‘양심’과 ‘정의’를 간절히 믿고 싶다.

육중한 철도공사를 상대로 근로자임을 주장한 ‘여승무원’들의 싸움도 결국 법정으로 이어졌다. 소송이 시작되고 몇 해를 넘겨가며 피 말리는 시간을 견뎌 받아 든 대법원 판결은 “KTX 여승무원을 코레일 근로자로 인정할 수 없다”였다. 절벽 같은 결과에 어떤 이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고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남은 이들은 지금도 서울역과 부산역에서 1인 시위를 지속하고 있다. 힘없는 이들의 싸움은 여전히 이어진다.

KTX '여승무원’ 소송이 서울고등법원으로 되돌아가 파기환송심이 확정되던 날, 대법원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대선개입 혐의에 대해 13:0으로 무죄를 판결했다. 누구라도 이것이 진정 사법부의 모습인가를 묻게 되는 날이었다.

법원은 이미 ‘정의’를 바라는 힘없는 이들이 마지막 기댈 곳이라는 소임을 저버렸지만, 여전히 많은 사건들이 법원에서 시시비비가 가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특히나 언젠가부터 정치적 영역의 사안들이 빈번히 사법부의 판단에 맡겨지고 있다. 지금의 정치사법화는 법치주의의 실천이라기보다 왜곡된 민주주의의 결과이자 정치의 자기부정이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갈등과 긴장관계를 유지해왔는데, 이러한 긴장관계는 원칙에 관한 측면 외에 현실의 권력관계도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정치의 사법화는 ‘사법부의 정치화’와 분리되지 못한다. 사법부의 정치화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가 제 기능을 다하고 민주주의가 작동되도록 하는 수밖에 없겠지만, 그나마 미리 마련할 수 있는 조건이 사법부 구성을 다양화 하는 것이다.

최근에 한국을 방문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긴즈버그 대법관은 9명의 대법관 중 진보성향을 대표하는 인물로, 지난 6월 동성결혼금지 위헌 판결을 통해 온통 무지개 깃발이 나부끼도록 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그 구성에 있어서 대체로 보수(4명) 진보(4명) 중도(1명) 성향 대법관들이 황금비율을 이뤄 사회의 여러 목소리를 드러내고 논쟁을 통해 결론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단다. 

우리는 어떤가? 한국 최고법원인 대법원의 대법관은 총 14명으로, 임기 6년에 연임이 가능하고 정년은 70세이다. 그런데 현재 대법관 구성을 보면 다양성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못하다. 14명 중 1명을 제외한 13명 모두가 법관 출신으로, 정치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과도하게 보수 편향적이다. 게다가 12명이 서울대 법대 출신이고, 2명을 뺀 나머지 12명은 모두 남성이다. 16일 퇴임을 앞두고 있는 민일영 대법관의 후임도 ‘서울대 법대, 법관 출신, 50대 남성’이라는 판본 그대로이다.

대법관 구성이 이렇다보니 시민들의 정서와는 달리 정치적으로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서도 다양한 견해와 해석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13:0’이라는 일방적인 판결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최근에 OECD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사법신뢰도는 27%에 그치고 있다고 한다. 절반도 믿지 못하는 사법부에 어찌 판결을 구할 수 있을까.

힘없는 이들은 여전히 법원의 ‘정의’와 법관의 ‘양심’을 믿고 싶다. 그러니 사법부는 스스로 존재 자체를 위해서라도, 달라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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