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띄우다 이승만으로 갈아탔던 조선일보의 '흑역사'

['조선일보 대해부' 2권] 4·19 혁명 땐 독재 타도 외치다 5·16 이후 다시 정권 나팔수로

2014-11-08     조수경 기자

올해로 창간 94년을 맞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전체 지면을 분석한 책이 각각 5권으로 출간됐습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일제강점기, 4·19혁명부터 1987년 민주화운동까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주요 사건을 어떻게 기록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에 각 책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조선·동아 94년 지면 대해부 “반민족·반민중·반민주 언론”>
             <조선일보가 윤봉길 의사를 ‘이봉길’로 오기한 이유>

조선일보는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지’로 전락했지만 해방 후에는 김구 선생의 노선을 지지했다. 1945년 11월 24일 사설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혁명 지사 김구 선생을 맞이하여 이 땅의 역사가 바르고 정당하게 결실되기를 바라며…”라고 했다. 이때만 해도 김구 선생만 ‘혁명지사’였지만 조선일보는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갑자기 “이 박사는 구국혁명의 노투사”라고 칭호했다.  

김구 선생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도 반대했지만 이후 찬성으로 돌아선다. 조선일보는 “문제는 오직 자립에 있고 자립은 오직 민족통일에 있음을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외치는 바”라고 했다. 하지만 1948년 1월10일자 사설에선 김구 선생의 노선을 “이상론”이라고 규정했다.  

<조선일보 대해부>는 조선일보의 갈지자 행보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조선일보는 1945년 11월 25일 복간된 직후부터 ‘우리의 위대한 혁명지사’ ‘민족 위해 수화 불사’ ‘혈의 투쟁을 일관’ ‘인정과 의지의 투자’ 등 최대의 찬사를 김구에게 바쳐왔다. 특히 방응모는 ‘김구 영웅화’에 앞장섰다. 그러나 방응모는 김구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의 단독정부론과 ‘유엔 감시 하의 남북 동시 선거’를 반대하고 나서자 위의 글에서 그를 ‘이상론자’ ‘몽상가’ ‘현실을 도외시하는 모험론자’로 몰아붙였다.”

친일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출범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일보는 “국가민족을 해한 적의 주구배를 숙청할 것은 국가적 역사적 강기의 확립을 뜻하는 건국의 기본정신”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고문으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을 잡아들인 반민특위 조사관들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한 사건에 대해 비판하지 않았고 무장경찰대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한 일에 대해서도 1면에서 3단 기사로 다룰 뿐이었다. 

왜곡보도로 인한 피해도 극심했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 제주도민들을 공산당 세력으로 규정하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제주 4·3사건) 그리고 전남 여수에 주둔중인 국방경비대 제14연대는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선일보는 여수·순천 사건의 배경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은 채 반란군의 학살에만 초점을 맞췄다. 조선일보는 “지난 20일 여수에서 국군 반란이 일어났단 보도를 듣고 우리가 제일 염려한 것은 인명의 실상과 시설의 파괴에 대한 것”이라고 전했다. 

<조선일보 대해부>는 “여순사건 이래 60년이 넘게 많은 전문가들이 조사하고 연구해서 발표한 자료들이나 외국인 기자의 보도를 보면 반란군과 동조자들의 살육이나 ‘인민재판’에 비해 진압군의 ‘학살’과 인권유린이 훨씬 더 가혹했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전쟁 시기에도 조선일보의 왜곡보도는 극에 달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수도를 사수하겠다’는 방송을 하면서 국민 몰래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갈 만큼 초기 전세는 남쪽에 불리했다. 

이런 전세는 조선일보도 알고 있었다. 조선일보가 발간한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는 “전쟁이 터진 25일 조선일보 사원들은 사장실에 모였다. 전방에 나갔다 온 기자들은 ‘전황이 매우 불리하다’며 비관적인 전망을 보고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전과 혁혁·요격 태세 완비/국군 일부 해주 돌입/적 사살 180명/전차 등 격파 58대>기사를 1면에 대서특필했을 뿐 자신들이 알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았다.  

고급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얼어 죽고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한 국민방위군사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국군이 북한 인민군과 빨치산과 내통한다는 혐의를 씌워 무고한 민간인 719명을 학살한 거창학살사건에 반발해 이시영 부통령이 사표를 제출한 사건을 전하면서도 그 이유는 전하지 않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반민주적 행위도 또한 보도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국회에 제출한 직선제 개헌안이 압도적 반대로 부결되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구속시켰으나(부산정치파동) 조선일보는 이승만 정권의 정치 공작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도 마찬가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3선 제한을 철폐하기 위해 개헌안을 냈으나 헌법 개정에 필요한 136표를 얻지 못했다. 정족수의 3분의 2가 찬성해야 통과되는데 당시 찬성표는 135표로 정족수 203명의 3분의2(135.333…)를 넘지 못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사사오입’ 논리를 내세워 통과시켰지만 조선일보는 침묵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