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료는 시청자와의 관계, 우리 맘대로 못 올린다"

[저널리즘의 위기, 뉴스의 미래④] 91년 역사의 세계 최대 공영방송 BBC, 연이은 인력감축 속에도 상식 통해 영광 지켜내

2013-06-23     정철운·허완 기자

한국 사회 저널리즘의 위기는 다층적이다. 출입처 중심의 취재관행과 심층 취재 부족은 뉴스의 전문성 부족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프라인에선 광고에 의존하는 수익모델에 위기가 왔다. 온라인에선 조회 수를 올려 돈을 버는 ‘클릭 저널리즘’이 야만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공영방송은 여론의 공론장 역할을 하는 대신 여론을 잠재우며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지역언론은 고사 직전이다. 서울공화국의 단면이다.
미디어오늘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대안적 모델을 찾는 연재를 기획했다. 건강한 저널리즘 없이 사회는 진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5월 23일부터 2주간 영국・프랑스・독일 등 해외 언론현장을 찾아 저널리즘이 ‘사양산업’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보여주는 움직임에 주목했다. 자본에 휘둘리지 않으며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는 공영방송, 온라인 뉴스 유료화에 성공한 탐사보도매체, 지역민들의 이해를 대변하며 생존한 지역 언론까지 여러 도전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저널리즘의 위기, 뉴스의 미래①] 지역신문의 살 길, 결국 지역에 있다 : 틴틀 미디어그룹 회장 레이 틴틀 경 인터뷰
[저널리즘의 위기, 뉴스의 미래②] 언론의 독립을 원한다면, 독자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메디아파르’ 편집국장 에드위 플레넬 인터뷰
[저널리즘의 위기, 뉴스의 미래③] 국경 없는 공영방송이 유럽을 감싸고 있다: 프랑스·독일 협력공영방송 아르떼(ARTE)

런던의 옥스퍼드 서커스역에 내려 걸음을 재촉하자 고풍스런 19세기 건축물 사이로 BBC 사옥이 눈에 들어왔다. BBC(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는 1927년 왕실로부터 공영방송 면허를 받은 지 91년이 흐른 지금 세계 최다시청자를 보유한 공영방송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덕분에 BBC 관련보도는 한국에서도 제법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KBS가 공영방송으로서 제 역할을 못할 때마다 BBC의 사례는 늘 입에 오르내렸다.

그렇다면 BBC는 현재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취재진이 가진 첫 번째 물음이었다. 우리는 지난 4일 니키 클라크(Nikki Clarke) BBC 아프리카·아메리카·동유럽·남아시아 담당국장과  폴 라스무센(Paul rasmussen) BBC 대외협력 담당자를 만날 수 있었다. 대뜸 요즘 가장 큰 고민이 뭐냐고 물어봤다. 니키 국장이 답했다.

“시청자와의 끊임없는 연결이다. 우리는 언제나 뉴스를 소비하는 지점에 있어야 한다. 트위터가 있다고 갑자기 라디오 사용을 멈추진 않는다. 시청자가 뉴스를 소비하고 싶어 하는 여러 방식에서 모두 효과적으로 만나면서도 과거에 제공했던 것과 다름없는 범위와 질을 가진 뉴스를 계속 제공하는 게 요즘 고민이다.”

▷구조조정·수신료 동결…BBC의 현실 = 그런데 BBC는 ‘시청자와의 연결’에 고민할 여유가 없어 보인다. BBC는 21세기 들어 지속적으로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다. 재원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수신료는 2010년부터 2016년까지 145.5파운드(가구당 연간 26만 원)로 동결됐다.

2004년 당시 27,000명이던 직원은 2012년 현재 17,000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자연스럽게 제작과 보도인력이 줄어들었다. 대신 프리랜서 고용비율이 늘어났다. 2011년 BBC는 향후 5년간 간부를 포함한 3000명의 인력을 추가적으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당연히 BBC 내부의 화두도 구조조정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니키 국장은 “우리는 중세시대 인쇄술 발명에 견줄 만한 변화를 겪으며 살고 있다. 언론계의 모든 이들에게 경제위기는 도전의 순간이다. 우리만 직면한 도전은 아니다. 국민소득이 고정되거나 감소하고 있다면 조직이 운영방식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폴은 “예능과 드라마 분야에서도 구조조정이 있었다. 저널리스트만 줄어든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인원을 감축해도 문제는 또 있다. 제자리걸음인 수신료다. BBC가 발간하는 연간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수신료 수입은 약 36억 파운드(약 6조 3천억 원)로 50억 파운드의 총수입 가운데 72%를 차지했다. BBC는 모두 11개의 텔레비전 채널과 16개의 라디오채널, 1개의 온라인사이트를 운영하며 지난해 23억 파운드를 제작비용으로 썼다. 그 결과 지난해 총 5천만 파운드(한화 88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BBC는 그간 영국 외무부가 재원을 대던 BBC월드서비스 비용도 떠안게 됐다. 33개 언어로 전 세계에 방송되는 핵심 사업 분야인 만큼 추가적인 지출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언론은 BBC가 연간 3억 파운드(5천 3백억원)를 추가로 부담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당연히 내부에서 수신료 인상에 여론이 있을 법하다.


그런데 니키 국장은 단호했다. “수신료는 단순한 자금 충당원이 아니다. 수신료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BBC를 유지하기 위한 자금이지만, 동시에 시청자와의 관계다. 이 나라에 살고 있는 텔레비전 소유자 모두가 BBC와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 관계는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돈을 더 준다면 더욱 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공영방송은 국민들의 경제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

폴은 “공공 예산이 줄어든다면 BBC는 줄어든 상황 내에서 일하는 게 맞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수신료 인상이 계속 어렵다면 언젠가 상업광고에 의존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니키는 “그런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라 자신했다. 

▷성추문·오보 위기에는 공영방송의 자세로 돌파 = BBC의 위기는 비단 경영 분야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지미 새빌의 성추문 사건과 <뉴스나이트> 오보 논란 등이 지난해 연이어 불거지며 BBC는 체면을 구겼다. 2011년 사망한 BBC 대표 방송진행자 지미 새빌이 40년간 450명의 아동을 성추행한 충격적 사실이 그의 사망 후 드러났다. BBC 간판 프로그램 <뉴스나이트>는 보수당 고위급 인사가 어린이를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보도했으나 오보로 밝혀졌다.

하지만 BBC는 부끄러운 잘못을 감추는 데 급급한 한국 공영방송과 달리, 공개적으로 관련 사안을 처리하며 신뢰회복에 나섰다. BBC는 지난해 조지 엔트위슬 사장이 사임했고, 홈페이지에 ‘BBC의 위기’라는 별도코너를 만들어 관련 기사 배치를 하기도 했다. 지미 새빌의 성범죄 파문 이후에는 부당한 성문화를 없애기 위해 대대적인 사내 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탐사프로그램 <파노라마>는 지미 새빌을 둘러싼 추문을 낱낱이 보도했다.

니키 국장은 “우리는 수신료를 내는 시청자에게 좋은 일 나쁜 일 상관없이 모든 일에 있어 최대한 해명하고 책임을 지고자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시청자는 우리가 어떤 일을 했고 이를 어떻게 다뤘는지 알 권리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BBC는 왕실로부터 받은 공영방송 면허를 10년마다 갱신한다. 니키는 “갱신 시기가 되면 영국의 모든 사람들이 BBC가 무얼 해야 하는가를 놓고 토론을 벌인다”고 전했다. 사회적 약자들의 의제는 외면하고 정부 편향적인 보도를 해도 영원히 공영방송의 지위가 유지되는 KBS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니키 국장은 “수신료로 운영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영국의 모든 가정이 BBC에 대해 발언권을 갖고 있다는 말과 같다. 때문에 BBC에는 아주 다양한 의견이 수렴돼야 한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그저 수신료만 내고 아무런 의견이 없고 관여할 권리조차 없다면 사회적으로 걱정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BBC는 이처럼 공영방송으로서의 상식에 기반 해 지난 91년간의 위기를 돌파해왔다.

▷정권 교체에도 흔들리지 않는 공영방송의 ‘힘’ = 1987년 민주화 이후 KBS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늘 사장이 교체되며 ‘낙하산’ 논란이 불거졌다. 박근혜 정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같은 갈등은 한국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BBC에선 분명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니키 국장은 “BBC 사장이 정부를 통해 임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수년간 아주 중요한 지점으로 여겨져 왔다. 정치인들이 이따금씩 BBC에 불만을 품을 때조차도 그 누구도 BBC 사장이 정권과 함께 교체돼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 일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BBC도 완벽한 건 아니었다. 2004년 이라크전 참전을 둘러싸고 정부와 BBC 사이에 갈등이 터져 나왔고, 그 해 허튼조사보고서가 BBC에 불리하게 나오며 결국 영국정부를 비판하던 그렉 다이크 사장이 물러나 논란이 됐다. 하지만 이런 논란에도 정치권력의 교체 시기와 사장 교체 시기가 이어지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국 공영방송 이사회가 여당·대통령·야당으로 정파적인 배분이 이뤄지는데 반해 BBC를 감독하는 BBC트러스트는 정파적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따라서 집권세력의 영향력을 크게 받지도 않는다는 설명이다.

BBC트러스트는 그렉 다이크 사임 이후 탄생했다. BBC트러스트는 의장을 포함해 모두 13명이며, 국무총리와 여왕을 거쳐 임명된다. 위원의 임기는 저마다 달라 한국처럼 일괄적으로 뽑지 않는다. BBC는 온라인홈페이지에 이들의 경비지출 내역까지 공개하며 투명성을 강조하고 있다. 2012년 3월부터 9월까지 트러스트 위원들은 밥값·호텔비 등으로 모두 3만 파운드(5천 3백만 원)를 썼다. 이들 위원은 BBC보도를 두고 주기적으로 공정성 세미나도 개최하고 있다.

BBC가 처한 위기는 본질적으로 전 세계 언론이 처한 상황과 유사했다. BBC는 공공영역의 축소에 따라 구조조정과 인력감축을 피하지 못했다. 수신료는 당분간 인상이 어려워 재정적 어려움이 예고된다. 오보 논란도, 성추문도 있었다. 신뢰도가 떨어지는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BBC는 갖가지 위기를 정직하게 돌파했다. 시청자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잘못이 있다면 결국 인정하고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저널리스트는 공정보도와 질 높은 콘텐츠로 보답하고, BBC트러스트는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저널리스트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영국 시민들은 여전히 BBC를 신뢰하고 있다. 한국의 공영방송에 필요한 것은 수신료 인상이 아니라 이와 같은 ‘상식’의 복원이다. (통역=강수은) (영국=런던)

위 특별기획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진행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