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노조위원장 사임 "회사 위기관리 부재"
'기자 마약 투약 입건' 노조도 책임지는 차원… "조합원 보호 못해, 불명예 결정"
한겨레 소속 허아무개 기자가 마약 투약 혐의로 입건된 가운데 지정구 전국언론노조 한겨레지부장이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는 지난해부터 회사가 위기관리에 실패했다고 진단하고 노조도 이에 책임이 있다고 했다.
허 기자에 대한 징계위원회는 다음 주에 열린다. 보통 조합원에 대한 징계위가 열리면 노조위원장이 징계위에 참여해 조합원을 대변한다. 하지만 필로폰 투약 혐의로 허 기자에 대한 기소가 예견돼 현실적으로 노조에서 조합원을 보호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책임을 지고 직을 내려놓기로 한 것으로 해석된다.
지 지부장은 지난 17일 "징계를 앞둔 조합원을 변호해야 할 조합원 대표로서 입이 백 개라도 조합원을 변호할 수 없는 사태에 책임을 통감한다"며 "지부장의 직을 내려놓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어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불명예스러운 결정을 내리게 된 점 머리 숙여 용서를 빈다"고 덧붙였다. 지 지부장 임기는 오는 6월 말까지였다.
지 지부장은 회사의 위기관리 능력을 비판했다. 지 지부장은 "우리 기자가 마약 투약 혐의로 입건된 사건은 충격 그 자체이지만 노조는 매번 재연되는 회사의 위기관리 능력 부재에 더 큰 충격을 받는다"며 "회사가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있는데도 구성원들에게 대응이라며 '어떤 식으로든 화제에 올리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문하는 데서 할 말을 잃는다"고 사임 의사를 밝혔다.
경찰이 허 기자 모발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다고 발표한 지난 16일 한겨레 사측은 구성원들에게 "이번 일을 어떤 식으로든 화제에 올리지 않는 것이 이번 사안을 슬기롭게 풀어 가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회사는 판단한다" 등의 메시지를 보냈다. 당시 일부 구성원이 SNS에 허 기자 관련 글을 올렸는데, 불필요한 논란이 커질 수 있으니 반성하는 차원에서 언급을 자제해달라는 취지의 메시지였다.
지 지부장은 이를 "회사의 전략적 빈곤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며 "한마디로 조용히 넘기자는 말인데 참으로 부끄럽다"고 지적했다. 반면 조용히 넘길 의도였다면 경찰 발표 전후로 한겨레가 먼저 해명 및 사과문을 올렸겠느냐는 시각도 있다.
한겨레 노조는 지난해부터 사내에서 벌어진 잇따른 악재로 적지 않은 부담을 안고 있다. 지 지부장은 "이 시점에서 지난해 봄 비극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점을 용서 바란다"면서, 당시 경영기획실이 구성원들에게 "마음의 상처가 크다",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하겠다"고 재발 방지를 다짐한 것을 언급했다.지 지부장은 "그러나 이 메일이 전부였다"며 "재발 방지를 위한 어떤 조직 관리 노력이나 실천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여기서 '지난해 봄 비극'이란 지난해 4월에 있던 한겨레 동료 기자 간 상해치사 사건이다.
지 지부장은 경영진이 구성원 관리에 실패했다고도 지적했다. 그는 양상우 한겨레 대표이사가 지난해 5월 창간 29돌을 앞두고 구성원들에게 "구성원들 마음의 건강을 보살피고 엄정한 조직 기강을 세우는 방안을 입안 중"이라고 말한 뒤 심리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소셜미디어 준칙을 만든 것을 언급했다.
그러나 지 지부장은 "이런 조처로는 구성원들의 불안 요소를 다스리고 마음을 다잡는 데 실패했다는 게 이번 사건이 증언하고 있다"며 "이메일로 구구절절 수사만 늘어놓았을 뿐 행동도 실천도, 무엇보다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고 비판했다.
지 지부장은 노조의 한계도 인정했다. 그는 "제 능력이 부족해 오늘 내부의 참상을 목도하게 된 것에 부끄럽고 조합원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음을 고백한다"며 "부디 현재 한겨레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경영진의 비상한 행동을 촉구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