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노사가 파업 3일을 앞두고 단체협약을 비롯한 ‘회사 정상화’ 방안에 합의했다.

노사는 23일 김재철 사장·정영하 노조위원장 등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본교섭을 열고 공정방송을 위한 단협상 제도적 장치, 제작자율성과 지역사 경영자율성 보장 방안 등 세가지 핵심 쟁점에서 의견 접근을 이루었다. 전국언론노조 MBC본부는 이에 따라 26일로 예정됐던 파업의 철회를 선언했다.

지난 1월 회사측이 단협을 일방해지한 후 극한 대립을 빚어온 지 8개월여 만의 대타협으로서 MBC는 6개월 유예 기간이 끝난 지난 7월 15일 이후 약 2달여 동안 사상 초유의 ‘무단협 상태’에 있었다.

합의안에 따르면, 노조는 사측이 주장한 본부장 책임제를 수용하는 대신 사측은 ‘인사권 침해’라며 거부해왔던 중간평가제를 받아들였다. 본부장에 대해 보임 1년 뒤 조합원들을 상대로 의견조사를 실시해 과반수 참여, 3분의 2 이상이 공정방송 실현 의지에 문제가 있다고 의사를 표시한 경우 이를 사장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공정방송 침해 관련자 문책 조항도 애초 회사측은 공정방송협의회의 ‘과반수 찬성’과 ‘보임 1년 뒤’를 요건으로 제시했으나 가부동수라 하더라도 충분한 사유가 인정되면 사장이 이를 수용하기로 했고 기간도 보임 6개월 뒤부터 가능하도록 했다. 기존 단협 조항에는 보직발령 3개월이 경과한 시점부터 문책 요구가 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그간 접점을 찾지 못했던 제작자율성과 지역사 경영자율성 보장 방안 부분에서는 김재철 사장의 사내 분위기 쇄신 조치, 상향평가 제도 복원, 일방적 광역화 지양, 지역사 현안 해결을 위한 노사 동수 협의체 구성 등을 합의했다.

이용마 노조 홍보국장은 협상 타결에 대해 “일부 양보가 있었지만, 노조가 파업도 하지 않고 공정방송 실현을 위한 실질적인 칼자루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이진숙 MBC 홍보국장은 “서로 이견이 있었지만 ‘노’도 MBC이고 ‘사’도 MBC다”라고 강조하면서 “노사 모두 MBC의 일원으로서 점점 어려워지는 방송환경에 대비해 조직의 미래를 위한 대타협을 이루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9월 21일 진행된 노사 본교섭 장면. 이때까지만 해도 협상 결렬과 파업 돌입을 전망하는 시각이 많았다.(사진=MBC노조 제공)
 
애초 MBC 안팎에서는 협상 결렬로 결국 노조가 파업에 돌입할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았다. 예정된 파업을 불과 4일 앞둔 지난 9월 22일, 노조는 “김재철 사장의 회사 정상화 의지가 극히 불투명하다”는 내용의 21일 본교섭 결과를 담은 특보를 발행한 바 있다. 공정방송을 위한 단체협약 조항에는 이미 어느 정도 의견접근을 이룬 상태였으나, 또 다른 협상 의제인 제작자율성과 지역사 경영자율성 보장 방안, 그리고 지난 2008년 ‘광우병 편’을 제작한 PD수첩 PD들에 대한 중징계가 문제였다.
 
이 중 회사측이 가장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 것은 20일 결정된 징계 문제였다. 회사측은 교섭 자리에서 “허위 보도에 대한 징계는 마땅하다”며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못 박았다. 지난 9월 2일 대법원이 형사 재판에선 비록 ‘무죄’를 선고했으나 일부 보도 내용을 ‘허위’라고 판시한 데 따른 회사측의 대응이었다.

극적 합의를 이룬 23일 본교섭장에서도 이 문제가 쟁점이 됐다면 노사는 끝내 타협을 이루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노조는 고민스러웠지만 이런 분위기를 간파하고 일종의 ‘우회로’를 택했다. PD수첩 제작진 징계는 ‘법적 대응’으로 푸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노조는 이에 따라 이날 교섭에선 PD수첩 문제를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 “제작진 징계를 이유로 파업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회사측이 공세를 취하자 “우리는 PD수첩 문제와 파업을 연계시킨 적이 없었다”는 반박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8월초 노조가 전 조합원 파업 찬반투표를 부치며 내건 ‘공식’ 명분은 “임금단체협약 쟁취와 MBC 정상화”였다.

이용마 국장은 이와 관련 “PD수첩 제작진 징계는 김재철 사장의 관리 범위를 넘어 현 정권의 강력한 의지가 개입된 것으로 판단했다”며 “그렇다면 김 사장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소송할 경우 우리의 승산이 충분하다는 법조계 전문가들의 의견도 확인했다. 굳이 교섭 자리에 올릴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막힌 구멍 하나가 뚫리자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21일까지 거의 논의되지 않거나 ‘평행선’을 그었던 회사 정상화 문제, 즉 제작자율성과 지역사 경영자율성 보장 방안도 속속 타협을 이뤘다.

인사권·경영권을 침해하는 조항 내지 제도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던 이전 회사측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문구화까진 못했지만, 김재철 사장은 일부 간부들의 리더십 문제에도 공감을 표한 것으로 전해진다. 없어졌던 상향평가 제도도 복원하기로 했다. 노조는 이 대목에서 “김재철 사장이 그 어느 때보다 전향적으로 나와 타결이 가능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이진숙 국장은 “회사 전체 이익을 위해서 노사 모두가 반 발짝씩 양보한 것이라고 본다”며 회사의 태도 변화는 MBC의 미래 등 ‘대의’를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노조 측은 그러나 이보다는 정치정세 등 주변 상황 변화가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용마 국장은 “10.26 재보선부터 내년 총선과 대선 등 민감한 정치일정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사장으로 앉힌 이명박 정부는 점점 레임덕에 빠져들고 있지 않느냐”며 “따라서 정권의 요구대로 MBC를 ‘장악’해야 할 필요성이 이전보다 많이 약화됐을 수밖에 없다. 재임 기간 동안 두 번이나 파업이 일어나는 전무후무한 불명예도 안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노조 입장에서 아직 안심하긴 일러 보인다. 당장 노사가 최종 합의문을 마무리중이던 27일 라디오본부에서는 또 일방적 진행자 교체 문제가 불거졌다. 가수 윤도현씨가 진행하던 <두시의 데이트>에서 강제하차당한 것이다. MBC 안팎에서는 이전 김여진씨 사례처럼 이른바 ‘소셜테이너 금지법’이 적용된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강제전출, 일방적 진행자·패널 교체, 프로그램 불방, 특정 아이템 취재중단 지시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던 두 주역인 윤길용 시사교양국장과 이우용 라디오본부장이 건재하다. 물론 본부장 중간평가제와 공정방송 침해 관련자 문책 권한 등 노조는 이번 협상에서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얻었다. 피켓시위, 성명전, 농성 등 그간 외형적·물리적 투쟁에서 노조는 이제 단협상 제도를 활용한 ‘합법적 투쟁’을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