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엄마, 나 왔수~”
“아이고, 우리 혜빈이 예빈이 왔구나.”“할머니, 안녕하세요?”
“그려, 그려. 귀여운 내 강아지들. 외할먼네 오느라고 힘들었지? 어여 올라와.”
“엄마. 엄마 눈엔 고만고만한 것들 둘씩이나 데리고 오느라 차에서 내내 시달린 막내딸은 안 보이우?”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고 혀도 그렇지, 이젠 제 자식 돌보는 것도 유세꺼리가 된다냐? 아이고 김 서방, 운전허느라 힘들었지? 사돈 어르신들은 다들 무탈허시고? 내 정신 좀 봐. 어여 와서 시원하게 식혜부터 한 사발 들이키게.”
“간만에 친정이라고 왔더니 나만 찬밥이네. 엄마, 나 삐쳐서 그냥 가우?”
“저것은 나이만 먹었지 저렇게 철이 없다니께. 김 서방이 고생이 많어.”
“엄마!”
“알았다, 알았어. 애들 핑계 대고 방구석에 콕 쳐박혀서 별로 일은 안 했겄지만, 잔머리 쓰느라 애 많이 썼을텡께 식혜 한 사발 마셔라.”

“이제 겨우 딸 취급이시네. 근데 뭐야. 엄마, 올케언닌 벌써 친정으로 튄 거유? 와~아무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기자님이시라지만, 너무하네. 엎어지면 코 닿을 데가 친정이면서.”
“손위 올케헌티 말뽄새허고는…진수 에미가 공이여? 튀긴 뭘 튀어? 진수 에미는 내일 출근해야 할 사람 아녀. 그리고, 너도 차례상 물리자마자 이렇게 친정으로 내뺐잖여.”
“어휴, 신문기자라고 해서 엄청 잘 나가고 돈도 잘 벌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집안 대소사땐 참 별로야. 명절 때도 항상 늦게 와서 일찍 가고. 아버지 제사 땐 당직 서야 된다고 안온 적도 있었지, 아마? 새언니처럼 일복 없는 여자도 드물꺼야. 부럽다, 부러워~”

“그래도 이번 연휴엔 토요일날 내려왔더라. 내가 장만 미리 봐 놓고, 차례 음식은 진수 에미가 다 한겨. 지금 네 입으로 들어가는 그 식혜도 올케 솜씨다. 오랜만에 진수 에미가 고생 좀 혔지.”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라고 편드시기는~. 언니가 돈 좀 쓰고 갔나 보네. 그래, 얼마나 받으셨수? 우린 안 드려도 되는 거지?”
“진수 에미가 일이 바빠서 그렇지, 너처럼 지 몸 돌보는 애냐? 제때 못 내려올 때도 항상 죄송허다, 면목없다 그러면서…”
“KTX보다 빠르게 현찰 쏴 준다 이거지? 하긴, 요즘은 돈이 효도하는 세상이니까. 근데, 이게 다 뭐야? 참기름, 참치, 올리브유, 김, 멸치…앗! 스*이랑 수제햄 세트도 있네. 이거 비싼 건데. 서울 갈 때 몇 개 싸가서 우리 애들 해 줘야지~”

“쯧쯧쯧. 애들 둘씩이나 낳았어도 너처럼 철 안든 앤 첨 본다. 이리 내. 니 언니가 에미 먹으라고 챙겨온 거여. 이빨 없어서 당최 뭘 씹을 수가 있남. 요번 여름에 찬밥에 물말아 마시는 거 보더니 단백질도 잡숴야 한담서 이번에 갖고 왔더라. 말이 나왔으니께 말인디, 넌 아무리 친정이라고 혀도 그렇지, 어른 있는 집에 오면서 어째 노상 빈손이여? 시댁 갈 때도 그런겨?”
“새언닌 출입처에서 이것저것 받은 거 갖다 주는 거잖아. 돈 주고 사오는 것도 아닌데 뭘…”
“암만 그래도 그렇지, 넌 고기 한 근이라도 끊어 와 봤어?”
“엄만, 우리 형편 뻔히 알면서 그러우. 김 서방 혼자 벌어 애 둘 키우기가 쉬운 줄 알우? 저기 포장 안 뜯은 건 뭐지? 우와~정** 홍삼이네. 자기야~식혜 그만 마시고 이리 와 봐. 이거 마셔. 이게 홍삼 중에서 제일 비싼 브랜드야. 엄마, 나 이거 반만 가져갈께. 다 주면 더 좋구. 헤헤. 요새 김 서방이 영 힘을 못 쓰거든. 올 여름에 휴가도 못 다녀왔잖우. 알았지? 나, 지금 싸 놓는다~.”
“휴우~딸은 칼만 안 든 도둑이라더니…”

#2.

“엄마~”
“내일 출근하려면 피곤한데, 집에서 쉬지 뭐하러 왔어.”
“그래도 명절이잖우. 나도 친정서 대접 좀 받아볼까 해서. 헤헤.”
“애들 땜에 허구헌날 드나들면서 뭐…. 안사돈은 건강하시지?”
“관절염은 고만고만하신 거 같은데, 이가 안 좋아서 뭘 잘 드시질 못해. 나 좋아한다고 총각김치 담가 놓으셨는데, 우적우적 씹어 먹는 나를 어찌나 부럽게 쳐다보시는지…안쓰러워서 혼났네. 아참! 어머니가 총각김치 싸 주셨는데, 엄마 좀 갖다줄까? 우리 어머니 솜씨, 엄마도 알잖아.”
“됐네요. 벼룩의 간을 달래지.”

“그런가? 헤헤. 아고고. 엄마, 나 좀 누울께. 간만에 육체노동 좀 했더니 뼈들이 지들끼리 춤추는 거 같아.”
“이번에 뭐 많이 차렸어?”
“아니. 어머니가 반찬 다 해 놓으시고, 장도 다 봐 놓으셔서 난 전 좀 부치고, 나물 볶고, 식혜 만들고 그랬지 뭐. 시댁 식구도 단출하고, 평소보다 더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명절 음식이란 게 가짓수가 많다 보니 끼니 때마다 설거지감이 산더미더라구. 그래도 가서 밥만 얻어먹고 와야 했던 때보다 맘은 편해. 이번에도 그랬어 봐. 시누이들이 내년 설 때까지 들들 볶았을 껄? 특히 우리 막내 시누이, 평소엔 ‘새언니, 새언니’하면서 우리 회사에서 하는 문화 행사 티켓이니 책이니 얻어달라고 갖은 애교 다 떨면서 명절만 지나면 ‘기자가 그렇게 좋은 직업은 아닌 것 같네요’ 하면서 시누이 행세를 한다니깐.”

“결혼 전엔 물도 한 그릇 안 떠다 먹던 공주님이 고생이 많으셔. 엄마처럼 안 산다고 노래를 부르더만. 그 편하고 좋은 직장들 마다하고 기자가 된다고 했을 때, 엄만 정말로 넌 나처럼 안 살 줄 알았는데…천하의 정지혜씨도 별 수 없으셔.”
“그러게 말야. ‘명절 증후군’같은 거, 난 모르고 살 줄 알았는데. 세상을 바꾸기가 이렇게 어렵다니깐. 그래도 난 다른 여기자들에 비하면 진짜 편한 거야. 우리 후배 기자 시어머니는 명절 때마다 전 100만개 부칠 준비를 하고 기다리신대. 다른 집 며느리들은 며칠 전에 내려와서 같이 장을 봤네 어쨌네 하시면서 말야. 첨엔 며느리 군기잡기 하시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형제들이 여럿이어서인지 조금씩 싸 주면 또 금세 없어진대요. 그나마 다행인 건, 신문기자들은 연휴 마지막 날엔 출근해야 하는 걸 시댁에서 아니깐 명절 스트레스도 당일날 오전이면 끝난다는 거지. 연휴 마지막 날 회사에 안 가더라도 시댁에 계속 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안사돈은 그런 시집살이는 안 시키시는 분이니까. 힘드셔도 당신이 좀 더 일하시는 분이지. 엄마처럼.”
“맞아, 엄마처럼. 이런 말 하면 박 서방이 화내겠지만, 어머님이 먼저 돌아가시고 아버님만 계셨어봐. 아들이라고 박 서방 하난데, 꼼짝없이 우리가 모셔야 할 판이지. 한 선배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 형부가 장남이라 선배가 명절 때마다 집에서 차례상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다 한대. 2~3일 정도 화끈하게 ‘서비스’하면 시댁에서 갖는 지분이 더 커진대나.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협상력도 커지고. 그래도 그 선배 시아버지는 세련된 건지 며느리 눈치 땜에 그런 건지, 집안일 같은 것도 잘 챙겨주시는 것 같더라. 급할 때면 애들도 맡아주시는 거 같고. 언젠가 통화하는 거 들으니까 선배가 쓰레기 분리수거도 부탁하는 거 같던데. 바쁜 기자 며느리가 차례상 준비하는 걸 엄청 고맙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 아, 며느리 사랑은 뭐니뭐니해도 시아버진데…”

“시아버지 계셨으면 네가 그 선배처럼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가? 하긴, 시댁 식구 많았으면 나도 연휴 당직 맡겠다고 난리쳤을지 모르지. 그거 알아, 엄마? 결혼한 여기자들한테 연휴 당직은 로또 당첨인 거. 당직 핑계로 시댁에 안 가는 거지. 평소엔 주부의 고충을 내세우며 토요 당직을 빼려고 해서 욕을 먹는 사람들이 연휴 때만큼은 과도한 남녀평등을 주장한다니까. 일부러 연휴 당직 서겠다고 순번 바꾸는 사람도 있어. 이건 박 서방한테 비밀인데, 나도 아버님 제사 때 딱 한 번 당직 바꿔서 안 간 적 있었어.”
“그때 일부러 안 간 거였어? 일이 바빠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러면 부모 욕 먹이는 거야. 다음부턴 절대 그러지 마.”
“알아요, 알아. 일도 일이지만, 그땐 내가 생각했던 결혼 생활하고 현실이 너무 다른 거에 화도 나고, 내가 박씨 집안에서 뭔가를 한순간에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기 어렵고, 그래서 힘들었어.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양반이지. ‘명절 때 화끈하게 해야 다음 명절까지 편하다’는 걸 깨달았달까. 큭큭.”

“그래, 정 기자님이 깨우친 비법이란 게 뭘꼬?”
“출입처에서 들어오는 소소한 명절 선물들 챙겨놨다가 시댁에 갖다 드리기, 용돈 아끼지 않고 팍팍 드리기. 이때 용돈은 투 트랙으로 드려야 해. 어머니랑 같이 장을 못 보니 명절 전에 미리 50만원쯤 부쳐 드리고, 올라올 때 30만원쯤 봉투에 담아 드리고. 바빠서 평소에 시댁 일에 소홀하니 명절 때라도 잘 해 드려야지.”
“결국은 물량공세네. 느이 애들 키워주느라 좋은 시간 다 보낸 이 엄마한텐 뭘 해 줄래?”
“에이, 힘들긴 해도 가까이에 딸이랑 사위 끼고 사니 외롭진 않잖우. 그게 선물이지 뭐. 그나저나 엄마, 피곤하지 않수? 찜질방 가서 땀이라도 좀 내고 올까?”
“애들은 누가 보고? 누구 말마따나, 소는 누가 키우는데?”
“고모 오실 때 안 됐나? 노친네도 아닌데 만날 앉아서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만 받지 말고, 오늘 하루 우리 애들 좀 보시라고 해.”
“됐네요. 애들 데리고 있을 테니 박 서방이랑 둘이 다녀와.”
“미안해서 그러지~. 고마워, 엄마. 찬바람 나면 올해는 꼭 내가 보약 한 재 해 드릴게. 그럼 나 다녀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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