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하 20도를 내리 오르며 언제 겨울이 갈까 싶던 겨울이 한풀 꺾이고 있음을 느낀다. 12,1월 몰아친 한파로 예년에 없이 방, 마당, 부엌, 수세 화장실 할 것 없이 수도관이 얼고 심지어 정화조 까지 얼어 유난히 추운 겨울에 전전긍긍 했어도 입춘이 지나니 어김없이 봄이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실종된 삼한사온과 백여 년 기상 통계를 비웃는 강추위, 기상이변도 그렇지만 이번 겨울에는 추위보다 더 혹독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해 말 시작된 구제역병으로 소 돼지 등 3백여 만  마리가 죽임을 당했다. 지금도 그치지 않고 진행 중이다. 이젠 축산농가의 황망하고 추스르기 힘든 낙망을 넘어, 지금은 오히려 식수오염, 전염병 등 매몰 이후 벌어질 만약의 사태 전개를 우려하는 수도권을 비롯해 도시 사람들의 걱정과 분노로 등장했다.

구제역 재앙 축산농가 시름에도 분비기 시작한 농자재가게

거기다가 조류독감으로 오리 닭 등 수백만 마리도 죽임을 당해 땅에 파묻혔다. 겨울 동안 1천여 마리의 가축이 무참히 인간에 의해 '청소'당했다. 끔찍한 일이다. 사람이 무언지, 사는 게 무언지,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시간 지나 잊어버리고 살아도 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도 동물일진데….

   
구제역 허들?
 
인간이 지구상 여러 생명과 똑같은 생명의 이력을 지닌 동물이라고 보면, 이번 구제역 재앙은 동물에 대해 가졌던 관념을 이제까지처럼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해가 뜨고 지고 달과 별이 밤하늘을 가로 지르고 있다. 철이 흐르고 있다. 농사는 철 따라 가는 길이고 농민은 철 따라 사는 인생이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움직거리고 경운기 트럭 트랙터의 일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농자재 가게에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닥친 올 봄 날씨가 어떨지 어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설날, 입춘이 지났으니 내일이 정월 보름이고 가까운 시간에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를 만난다. 조금 더 가면 개구리가 땅 위로 튀어나온다는 경칩이니 설사 꽃샘추위가 기승을 떨친다 한들 철을 따라 가는 길이 바뀌진 않을 게다.  

농사가 시작됐다. 맨 시작되는 작목은 고추와 감자. 고추는 씨를 구해 촉을 틔우기 시작했다. 싹이 틔워지면 상토 온상에 씨를 뿌려 모를 기르게 되고, 4월 즈음 작물이 동해를 입지 않을 때까지 온도, 수분, 영양 관리를 하게 된다. 감자는 씨감자용 24박스를 지역 농협에서 구매해 방에 쌓아 싹을 틔우고 있다. 적당한 날에 칼로 싹눈을 살려 가른 씨감자를 이달 말경부터 심기 시작하게 된다.

밭과 하우스에 고추, 감자를 정식하려면 미리 밭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겨울동안 거름 뿌리고 트랙터로 갈아놓았으니 이제 무엇보다 물을 대 땅 수분관리를 해야 하는데 물이 얼고 땅도 얼고 배관이 얼음으로 온통 꽉꽉 막혀 물이 통하지 않았다. 어렵사리 뚫어놓아도 또다시 얼었다. 땅속에 파묻혀 깔려있는 배관도 마찬가지다. 땅을 파고 얼음을 깨고 새로운 배관을 깔고 증기로 얼어붙은 관을 뚫고서야 물길이 터졌다. 마침내 물모터가 돌아 파이프를 타고 물이 쉭쉭 흐르고 스프링클러가 빙글빙글 물을 뿌리며 도니 반가운 맘을 휘감으며 생기를 뿌려준다.   

농사일은 늘겠지만, 한 번 가본 길이니…

올 밭농사는 고추가 줄고 감자 면적이 많이 늘었다. 감자를 하우스 500평, 밭 900평 합쳐 1,400 평에 심는다. 감자와 더불어 고추 500 여 평, 옥수수 천여 평이 주 작목이고, 밭에 심을 방울토마토, 오이, 가지, 당근, 봄무 등 채소류 모종을 기르고, 도시 소비자와 단체에 공급할 고추, 상추, 가지, 방울토마토 등 모종을 기르는 일이 봄날 일이 될 것 같다.

봄. 기다려진다. 시골 마을 어귀 정자 느티나무 돌아 동네 들어서듯 봄이 올 것이다. 딱따구리 마른 참나무 패듯 딱따그르르 소리울림처럼 봄이 올 것이다. 사계절 중 겨울을 싫어하는 내 성미 탓일 것인데 겨울을 빠져나오는 것이 뒷골목 돌아 나오듯 좋다. “어서 오게나, 봄이여….”

   
삼방리농장 인근의 과실나무들.
 
올해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맘에 여유를 품고 갈 수 있다는 생각도 맘 한켠 믿는 구석이다. 일은 지난해 보다 더 많을 것이 예상되지만, 가보고 와본 길이니 걱정은 덜하다. 지난 사시사철을 겪으며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면 철을 느끼게 된 것이다. 종종 만나는 사람이 익숙해진 농군 이력이 붙었다고 덕담을 보태주는 것도 싫지 않은데 농사에 대해 경험과 앎도 올 지나면 훨 도톰해질 것이다. (2011.2.16)

 

   
 
 
2년차 농사꾼의 농사일기를 연재합니다. 필자 정혁기 농민은 서울대 농대를 나왔지만, 농사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지난해로 올해 두 해째 농사를 짓게 됩니다. 그의 농사일기를 통해 농사짓기와 농촌과 농민들의 애환과 생활상을 접해봅니다. [편집자주]

정혁기 농민은 현재 친환경농업의 과학화를 추구하고 있는 사단법인 흙살림의 삼방리농장(충북 괴산군 불정면)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부설 민족민주연구소 부소장, 우리교육 이사, 월간 말과 디지털 말 대표이사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부소장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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