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정관수술을 받으면 예비군 동원훈련을 면제해 주던 시대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성이 뭔지도 잘 모르는 ‘초등학교(정확히는 국민학교)’ 아이들에게 ‘딸 아들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면한다’는 표어를 넣어 포스터를 그리게 하는 대회를 열어 상을 주기도 했다. 셋째 아이부터는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었고, 아이가 셋이 넘는 가정은 주택청약에서 순위가 밀리는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오랫동안 이 나라에서 생명의 탄생은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조절 정책의 문제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피임이 아니라 낙태를 통해 출산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무런 거리낌 없는 행위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저출산이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는 상황으로 바뀌자 이제는 이런저런 출산장려 정책으로 아이 좀 많이 낳으라고 정부가 나서고 있다. 이렇게 바뀐 사회에서 일부 의사 단체가 낙태 반대 운동을 벌이고, 정부도 낙태 단속을 강화하겠노라는 방침을 밝히자 여성계가 여성의 임신·출산, 몸에 대한 자율권을 침해하는 반인권적 발상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낙태 논쟁에 불을 지핀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낙태 시술을 하는 병원 세 곳을 고발 조치 한 이후, 낙태 시술 비용은 최고 열 배까지 뛰었고, 낙태 시술을 받기 위해 외국에 나가는 경우조차 생기고 있다고 한다. 여성계의 주장은 정부 방침대로 단속이 강화되면 낙태 시술이 점차 음성화되고 비용이 높아져, 결국 여성의 건강과 안전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 포스터  
 

의사의 양심을 걸고 낙태를 반대하는 프로라이프의 입장은 생명윤리와 직업윤리를 바탕으로 한 합법적 행동이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양육에 대한 여건의 개선이 없는 정부의 무조건적인 단속방침은 여성의 몸과 태어날 아이를 여전히 ‘국가 발전을 위한 도구’로만 간주하는 예전의 인구정책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의식을 보여준다.

<밀양>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던 해인 2008년, 황금종려상을 받은 루마니아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국가가 현실적 문제를 외면하고 낙태를 법적으로 규제만 하려할 때 벌어지는 참혹한 상황을 그린 영화다. 영화는 ‘1987년. 루마니아 혁명 2년 전’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이 시기 루마니아에서 낙태는 불법이었다.  

   
  학교 기숙사에서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가비타와 오틸리아  
 

정치적으로 위태로운 시대이기도 하지만, 학교 기숙사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여대생 가비타와 오틸리아의 모습은 유달리 불안스럽다.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고, 부산하게 짐가방을 꾸리고, 시험공부를 걱정하고, 돈을 빌리러 다니는 이십 대 초반의 여대생들을 바싹 따라붙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불안하기 이를 데 없다. 들고찍기로 인물들의 움짐임을 고스란히 담아내지만 정작 그 불안의 원인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삼십여 분이 지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불법 낙태 시술이 그 모든 불안과 초조의 배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골에서 올라 와 기술학교를 다니는 가난한 형편에다, 남녀 간에 함께 했을 성행위의 책임을 임신이라는 육체적 굴레로 감당해야하는 젊은 여학생 가비타에게 기댈 수 있는 친구 오틸리아가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그 아가씨들의 육체 자체가 참 비루하다. 생리 중이든 바로 낙태 시술을 앞두고 있든 모자란 낙태 시술비용을 몸으로 때워야하는 겨우 그 정도 주변으로 사랑이라니......

 

   
  불법 낙태시술자로부터 비용문제에 대한 설명을 듣는 가비타와 오틸리아  
 

 

 불법적으로라도 낙태 시술을 받기 위해 임신한 기간을 2개월이니 3개월이니 얼렁뚱땅 넘겨버리는 가비타에게 시술자는 말한다. 3개월까지는 낙태지만 4개월부터는 살인이니 잘 생각하라고. 그래도 낳을 수 없는 아이를 없애려거든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라고. 그래서 두 친구는 마련할 수 없는 돈을 몸으로 대신한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에서 카메라는 낙태 당사자인 가비타가 아니라 친구 오틸리아에게 집착한다. 친구의 낙태를 지켜보는 입장에서 판단하고, 선택해야하는 오틸리아의 고통을 관객더러 지켜보라고 요구한다. 이런 일은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러니 혼자 두지 말고 곁에서 함께 감당하라고. 그러나 그걸 감당하기에 현실은 너무 잔혹하고, 낙태 뒤에 찾아오는 공복은 지독하게 치욕스럽다. 그래서 영화는 불현듯 끝나버린다. 

   
  불법낙태시술을 받기 위해 누워있는 가비타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의 루마니아는 이미 낙태가 합법화된 시기였다. 이 시기 루마니아의 낙태율은 유럽에서 가장 높았다. 1989년 차우셰스쿠 처형 이후 가장 먼저 취해진 조치가 낙태합법화였던 까닭은 독재정권이 생명존중의식 때문이 아니라 인구를 국가 자산으로 물화시켰던 데 대한 반작용이다.

출산율이 바닥을 치자 현금에서 출산준비물까지 이런저런 당근을 내밀며 아이를 낳으라고 온나라가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낙태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더구나 독신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천시하고, 합법적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라도 그 양육을 온전히 부모만이 감당해야하며, 이혼가정이나 부모없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사회가 함께 하지 않는 현실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태어나는 모든 아이들이 일회적인 출산장려금이나 출산용품 보따리보다 지속적인 사회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은 아이들이 행복하게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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