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성화 봉송을 둘러싼 중국인 폭력시위의 여파가 쉬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한국 반대단체를 향해 돌을 던지고, 시내호텔까지 추격하여 집단폭력을 행사한 일은 국제사회에 섬뜩한 충격을 주었다. 경찰과 취재기자가 여럿 다쳤고, 오성홍기 아래 저질러진 집단폭력시위에 우리의 치안주권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국민의 분노를 더욱 부추긴 것은 사건 이후의 중국정부의 태도이다. 사건의 본질은 민주적 법질서를 지키지 않은 중국시위대의 집단폭력성에 있다. 그런데도, 중국정부는, “서울 성화 봉송 현장에 있던 중국인들은 원래 선량하고 우호적인 사람들이며, 성화를 지키려는 정의로운 행동이다”고 불법폭력시위를 정당화했다.

균형감각과 객관성을 담보해야할 중국언론도 마찬가지이다. 관영 <인민일보(人民日報)>는 4월28일자 기사에서, “한국에서 티베트를 지지하는 세력의 저항이 있었으나, 한국 전역에서 모인 중국유학생들로 인해 성화는 무사히 마무리되었다”고 보도했다.

관영 <환구시보(環球時報)> 4월30일자 기사에서, “한국 언론이 중국인의 과격행위를 과장하고 있으며, 반중 감정을 부추기고 있다”고 1면 머릿기사로 보도했다. 폭력시위에 앞장섰던 재한중국유학생연합회 사이트에는, “큰일도 아닌데, 한국언론이 과장하고 있다”는 글이 올라와 있고, 티엔야(天涯, cache.tianya.cn)를 비롯한 중국의 인터넷 토론방에서는 오히려 한국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난무하다.

한국 비난 목소리 가득한 중국 인터넷

어디에도 폭력시위에 대한 자성과 성찰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한국정부의 연이은 항의에, 중국외교부 부장조리가 뒤늦은 유감을 표시했지만, 중국의 안하무인격 태도에 우리 국민 대다수는 분노를 삭히지 못하고 있다. 이번 폭력시위 배후에 중국대사관이 중국유학생 3분의 1 이상을 동원했다는 물증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는 마당에, 남의 나라에서 집단폭력을 행사한 자국민을 정의롭다고 우기는 중국정부가 과연 세계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을 치를 자격이 있는지 묻고싶다.

중국정부의 삐뚤어진 시각은 과거 중국영토 내 벌어진 외국인시위에 대한 강경조치와 비교된다. 지난 2005년 12월 한국농민단체는 홍콩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 반대하는 집단시위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1001명이 연행되고 11명이 구속되었다. 중국홍콩정부는, “어떤 사람이라도 자유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사용한다면 반드시 법률 절차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강력 대응하였다. <밍바오(明報)>와 <원회바오(文匯報)> 등 홍콩언론은 한국시위대의 과격행동에 대해 구속과 출국금지 등 강력한 법적조치로 대응하라고 요구했다.

한국시위대 구속에 대해 한국정부와 언론은 자성의 자세를 보였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당국은 즉각 유감의 뜻을 표했고, 구속자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저자세외교라 불릴 정도로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언론 또한 국가위상을 훼손한 행위로 간주하며, 민주적 법질서 속에 자유의사를 표현하는 성숙한 시위문화를 강조하였다. 이영애와 이병헌 등 한류스타와 기독교단체에서도 유감을 표하며, 한국시위대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홍콩과 서울의 두 사건을 비교하면 중국정부의 어이없는 이중잣대가 명백히 드러난다. 외국인시위대에 대해 강경한 법적조치를 취했던 중국정부가 남의 나라에서 폭력을 행사한 자국민의 시위를 선량하다고 옹호하는 것이 과연 그들이 말하는 정의인지 되묻고 싶다. 아무리 역지사지(易地思之)라지만 이건 아니다. 중국정부가 중국영토 내 외국인시위는 엄단의 대상이고 남의 나라 자국민의 폭력시위는 정의라고 우기는 한 더 이상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이 될 자격이 없다.

들끓는 한국여론에 대한 중국정부의 첫 반응은 더욱 황당하다. 5월부터 산동성 칭다오(靑島)시에서 열리기로 했던 한국의 비보이 댄스공연을 안전상의 이유로 취소했는가 하면, 5월초 주중 한국문화원이 주최하기로 했던 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는 한국거리문화축제도 공안국의 비준이 지연되는 바람에 취소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후속조치는 무엇을 말하는가. 중국정부는 폭력시위에 대한 한국의 정당한 문제제기조차 포용할 능력이 없는 나라인가.

집단 폭력시위 정당화 결코 용납 안돼

폭력시위마저 애국주의로 정당화하는 중국정부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해 국제사회의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중국대륙을 휩쓸고 있는 애국주의 열풍은 빠링호우(八零後)세대라 불리우는 개혁개방세대의 등장 탓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올 1월 베이징학술회의에서 만난 베이징대학의 장이우(張頤武)교수는, “이제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만큼 일본과 한국도 그에 걸맞은 새로운 대접을 해야 할 것이다”고 자랑삼아 말했다.

애국주의 열풍은 고속경제성장에 자신감을 얻은 중국인의 중화의식과 서구제국에 피해받은 역사적 콤플렉스가 중층결정된 대국강박증으로 보인다. 물론, 그 배후에는 경제성장 그늘에서 파생된 빈부격차·도농격차·소수민족 문제 등 당면한 사회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중국정부가 애국주의 열풍을 체제수호이념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도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남의 나라에서의 집단폭력시위를 정의라고 포장하고, 후속조치로 민간교류를 억압하는 속좁은 중국이라면 결코 21세기 국제사회의 리더가 될 자격이 없다. 한국과 같은 가까운 이웃을 잃게 될 것이고, 국제사회에서도 덩치만 큰 지진아(遲進兒)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친구를 목숨만큼 아껴온 중국인들이 애송하는 당나라 왕보(王勃)의 시 중에서, ‘바닷 속에 자기를 알아주는 벗이 있으면, 세상 끝이라도 가까운 이웃과 같다(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라는 구절이 있다. 중국은 진정으로 한국과 좋은 이웃이 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이제 중국이 응답해야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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