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지음/김태희 옮김/교양인 펴냄
"프로파간다는 사랑과 같다. 일단 성공한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 과정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독일 제3제국의 선전장관이자 철학박사(인문학 박사를 통칭)였던 요제프 파울 괴벨스(Joseph Paul Goebbels)가 남긴 일기의 한 구절이다.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NSDAP: 나치)의 이념을 히틀러와 함께 완성시킨 그는 나치즘만이 패전국 독일을 구원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고, 그 확신을 자신의 재능을 통해 관철시킨다.

"프로파간다는 사랑과 같다"

1927년 초여름 베를린 시민들은 번쩍이는 붉은 색 배경에 '공격'이라는 두 글자만 박힌 기묘한 포스터를 시내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어 다음주에는 '공격은 7월4일 시작된다'는 포스터를 보게 된다. 그리고 7월4일 괴벨스는 나치의 정파지인 '공격(Der Angriff)'의 창간호를 발간한다. 이는 현대 광고기법의 하나인 티저 광고(teaser advertising)의 시작이 된다.

1930년 나치당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 소위 호르스트 베셀이 공산주의자와의 폭력사태에서 숨지자 괴벨스는 그의 장례식에서 지난해 자신이 만든 노래를 진혼곡으로 사용한다. 그 곡은 3년 뒤 제3제국의 국가로 채택된다.

같은해 독일영화사 UFA가 레마르크의 반전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영화로 제작해 상영하자 제국의회 의원 괴벨스는 제작을 허가한 내무부 장관에게 맹공을 퍼부어 상영을 취소시켰다. UFA는 나치 집권 후 괴벨스에 의해 국유화된다.

1932년 총선에서 괴벨스는 편지봉투에 넣어 발송할 수 있는 소형 레코드판 5만장을 찍어 선전전을 펼쳤다. 또한 10분 분량의 유성영화를 다량 제작해 각 지방도시에서 상영했다.

   
▲ 1932년 대통령 선거 연설을 하고 있는 히틀러. 옆에 괴벨스가 서있다. 이 선거전에서 괴벨스는 전단과 포스터를 적극 활용했으며, 처음으로 히틀러를 신화로까지 미화했다. ⓒ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
1933년 국민계몽선전장관에 임명된 괴벨스는 통신사를 통합하고, '편집인 법률'을 제정해 사실상 신문과 잡지 발행인들의 인사권을 장악한다. 이어 독일의 지역방송국들은 베를린 중앙방송국 휘하의 제국방송국으로 통폐합됐다.

같은 기간 그는 '국민수신기'라는 이름을 붙인 보급형 라디오를 대량 보급한다. 기존 라디오 가격이 200~400 마르크였던 반면 국민수신기는 76마르크에 불과했으며, 여기에 보조금을 지급해 최저 35마르크까지 가격을 낮췄다. 그 결과 1933년에 25% 가량이던 독일의 라디오 보급률은 8년 만에 65%로 뛰어올랐다.  

당시 '뉴미디어' 라디오·TV 적극 활용    

이후 괴벨스는 프로그램 연출에도 개입해 총통의 정례 방송 연설, 독일군의 전황보도 등 각각의 프로그램 도입부에 독일 작곡가들의 작품 구절을 짧게 방송토록해 시그널 뮤직의 전형을 만든다.

역시 같은 기간 독일의 재무장을 선언한 히틀러는 디자이너 휴고 보스에게 독일군의 디자인을 지시한다. 괴벨스는 이 과정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독일군복은 이후 나치의 선전 포스터에서 빠지지 않는 주요 테마가 된다.

1934년 그는 뉘른베르크에서 열려온 나치 전당대회를 기획하면서, 천재적인 여성감독 레니 리펜슈탈을 기용해 다큐멘터리 영화 <의지의 승리>를 제작토록 한다. 리펜슈탈은 36대의 카메라를 엘리베이터, 고가 사다리차 등에 탑재해 하이앵글로 잡은 극적인 군중씬을 연출한다. 이 장면은 <스타워즈> 등 이후 영화 속 장엄한 장면연출에서 수없이 재현된다.

1936년 열린 베를린 올림픽 행사기획에 관여한 괴벨스는 올림픽 최초로 아테네에서 채화한 성화를 개최지까지 릴레이 운반하는 이벤트를 시작토록 한다. 리펜슈탈은 다큐멘터리 영화 <올림피아> 제작을 지시받았고, 슬로우 모션·수중 촬영·파노라마 공중 촬영 등 오늘날 일반화된 스포츠 촬영 기술을 처음으로 도입한다.

   
▲ 1933년 10월20일 베를린 체육궁전에서 나치당원들의 응원과 함성 속에 입장하는 히틀러와 괴벨스. 이날 집회는 히틀러의 국제연맹 탈퇴 결정을 그의 신임문제와 연계해 국민투표로 치르기로 한 후 지지를 호소하는 자리였다. 11월12일 투표결과는 '총통과 조국'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
베를린 제국방송사는 16일간의 올림픽 기간 중 67명의 아나운서를 통해 500개의 독일 국내 프로그램 외에도 2500개의 보도를 28개 언어로 19개 유럽 국가와 13개 비유럽 국가에 송출한다. 이는 당시 방송시설을 갖춘 지구상의 거의 모든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올림픽 보도 사상 최초의 일이다. 이와 관련해 외국 라디오 아나운서들은 괴벨스에게 전보를 보내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나치 선전선동은 20세기 미디어 관련 연구에 지대한 영향

로버트 제멕키스 감독의 1997년 작 영화 <콘텍트>는 제국방송사가 시험 송출한 히틀러의 올림픽 개막연설 TV중계를 외계인이 수신하게 되면서 외계인과 지구인의 접촉이 시작된다는 설정으로 시작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 같은 괴벨스의 행적은 단순한 파시스트 선동가의 만행 정도로 치부되기에는 20세기 미디어사(史)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너무나 크고 깊다. 실제로 괴벨스가 남긴 나치의 선전선동은 이후 미디어 관련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후 미국에서는 2차 대전동안 독일군이 보여준 광신적 전투력과 절대적 복종이 나치의 프로파간다에서 비롯되다고 판단,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로 하여금 라디오 방송과 영화 등이 수용자들의 정치적 판단과 심리상태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토록 했다.

이후 1940년대 말 실시된 라자스펠트의 라디오 수용자 연구와 호블랜드의 신병교육 실험 등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된 연구다. 이후 미국에서 시작된 실험과 서베이를 통한 경험실증적 커뮤니케이션학의 전통의 기원은 결국 괴벨스로부터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언론을 통해 사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조작한 정치인으로는 1950년대 미국을 '빨갱이 사냥'의 회오리에 몰아넣은 공화당 상원의원 요셉 맥카시(Joseph R. McCarthy)가 유명하다. 그러나 맥카시는 단지 기자들의 마감시감에 맞춰 폭로를 터뜨리는 '언론 플레이'의 수준에 그쳤다.

반면 괴벨스는 당시로선 탄생한지 10년도 안되는 뉴미디어인 라디오에 주목했고, 더욱 생소한 TV방송을 적극적으로 시도했을뿐더러, 기존의 매체들 역시 창의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1000쪽에 걸쳐 괴벨스 행적과 생애 천착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은 이러한 괴벨스의 행적과 생애에 대해 상세한 소개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괴벨스의 선전선동정책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한 서적은 <독일 제3제국의 선전정책>(도서출판 혜안 펴냄/데이비드 웰시 지음)과  <히틀러의 뜻대로>(도서출판 울력 펴냄/귀도 크놉 지음) 정도였다. 나머지는 히틀러 평전 류 내지는 일반 역사서의 일부분, 혹은 밀리터리 관련 서적의 한 꼭지 정도의 수준으로 다뤄져왔다.

그러나 앞서의 책들은 전승국인 미국이나 영국의 관점에서 쓰여진 2차 자료들에 기반한 공식기록이거나 당시 인물들의 증언에 기반한 개인적인 행보에 대한 것들인 반면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은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가 보관해온 1923년에서 1945년 사이에 괴벨스가 남긴 8만 여쪽에 달하는 일기를 비롯해 각종 서신과 소송관련 문서 등 1차 사료에 의거하고 있다.

저자인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Ralf Georg Reuth)는 이미 지난 2002년 <괴벨스 일기>를 펴낸 바 있으며, <히틀러, 정치적 전기>(2003년)를 통해 히틀러와 그 주변인물에 대한 기록을 정리했다.

또한 괴벨스가 2차세계대전 동안 대국민 선전을 위해 영웅으로 만든 에르빈 롬멜 장군에 대해서는 <로멜>(2004년)이라는 별도 서적을 낸 적도 있다.

자료가 방대한 만큼 책의 분량 역시 주석 포함 1000여 쪽에 달한다. 이 방대한 분량을 통해 괴벨스가 나치당 내에서 자신의 선전정책을 관철시켜 나가는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들을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다.

제3제국의 모든 언론을 장악하고 문화원 원장자리까지 차지했던 그였지만 헤르만 괴링 등 나치당 내의 경쟁자들의 견제로 예술분야에서는 통제력이 제한됐다는 내용 등은 구체적 사료로서의 값어치도 크다 할 수 있다.

알려져 있지 않은 괴벨스 개인사도 담겨

물론 괴벨스의 개인사에 대한 기록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괴벨스의 유년 시절은 물론, 장애를 안은 사회 낙오자로 방황하던 청년시절의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다. 극단적 사회주의자였던 괴벨스가 극우 나치당의 이데올로그로 변신했고, 당내의 좌파 세력 숙청에 앞장서게 되는 과정에서의 기록은 눈여겨 볼만 하다.

단 이 책에 기술된 내용만으로는 이 같은 급작스런 입장변화를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설명되기는 어렵지만 당시 그가 남긴 기록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괴벨스 개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들에게는 일독의 가치가 있다.

또 독일 패망 당시 도피에 나선 히틀러의 측근 대부분과 달리 끝까지 베를린을 지키다 가족과 함께 음독자살한 괴벨스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서도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소련군 진주 당시 발견된 괴벨스의 화장된 시신 사진까지 보여주고 있어 '악인의 말로'에 대한 교과서적 교훈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도 실망을 안기지는 않을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