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비정규직들의 연대체? 당연히 필요하고 중요하다. 미국엔 IASTE가 있지 않느냐.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종사자들이 하나의 노조로 모이는 큰 그림을 그린다. 문화·예술계 ‘을’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우산도, 꼭 필요하다.”

영화·방송·미디어계 노조 활동가들이 비정규직 노동 운동을 두고 한목소리를 낸 과제가 있다. 다양한 분야·직군 종사자들을 공동의 목적 아래 하나로 아우르는 ‘우산’ 만들기다. 통합 노조든, 느슨한 연대 기구든 형식은 필요에 따라 다를 테지만, 소외된 자들이 서로 연대해야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문제의식은 같다.

IASTE(International Alliance of Theatrical Stage Employees)는 연극, 영화, 방송, 전시 등 예술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기술직 노동자들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미국의 노조다. 홍태화 영화산업노조 사무국장은 “특히 영화와 방송 제작 현장의 노동환경은 거의 같다. 상영하는 매체의 차이, 2시간 짜리 영화냐, 1주일에 2시간씩 영화(방송)를 계속 상영하느냐 그 차이일 뿐”이라며 IASTE처럼 “방송, 영화를 비롯한 엔터테인먼트 전 분야의 노동자들의 하나로 모이는 노조”를 청사진으로 그린다고 밝혔다.

▲27일 저녁 6시 서울 상암동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방송 미디어 노동운동 5년, 앞으로의 10년은?”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27일 저녁 6시 서울 상암동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방송 미디어 노동운동 5년, 앞으로의 10년은?”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27일 저녁 6시 서울 상암동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방송 미디어 노동운동 5년, 앞으로의 10년은?” 토론회가 열렸다. 방송·미디어 노동운동의 지난 5년을 돌아보고 향후 10년을 전망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홍 사무국장을 포함해 김기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 김한별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장, 이기범 언론노조 전략조직실장, 진재연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사무국장 등이 모여 고민을 나눴다.

노동자성 인정 확대 만큼 방송사 꼼수 늘었다

‘지난 5년’이 특정된 까닭은 방송·미디어 비정규직 운동이 본격적으로 발을 뗀 시점이 2017년이기 때문이다. 2017년 CJ ENM의 고 이한빛 PD가 사망하며 방송 제작 현장의 열악함이 공론화됐고, 직장갑질119 활동가들의 주도로 ‘방송계갑질119’ 익명채팅방이 개설되면서 그동안 은폐됐던 방송계의 각종 불공정 계약과 노동법 위반 문제가 폭로됐다. 이를 계기로 모인 방송스태프들은 2018년 7월 ‘방송스태프지부’를 설립했다. 방송작가지부는 이보다 8개월 전에 먼저 설립됐다.

이들은 5년 투쟁 동안 값진 결과를 얻었다. 무늬만 프리랜서들의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 인정이 대표적이다. 김기영 지부장은 “드라마 현장의 경우 모든 스태프가 노동자성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며 “2019년 7월 고용노동부는 ‘조수급’ 드라마 스태프들에 한해 노동자성을 인정했지만 올해 초 한 드라마 촬영감독이 민사소송에서 노동자성을 인정받았다. 감독급 스태프도 노동자라는 근거가 생겼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중노위 MBC 방송작가 부당해고 사건 판정 당일. 방송작가 조합원들이 환호를 하는모습. 사진=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영상 갈무리.
▲지난 3월 중노위 MBC 방송작가 부당해고 사건 판정 당일. 방송작가 조합원들이 환호를 하는모습. 사진=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영상 갈무리.

방송작가 현장도 마찬가지다. MBC 뉴스투데이에서 일한 작가 2명의 중앙노동위원회 승소 사례는 널리 알려졌다. 김한별 지부장은 “2015년께 외주제작사의 방송작가가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사례가 있고, 지난해엔 JTBC의 뉴스작가가 퇴직금 진정 사건에서 노동자성을 인정받고 이겼다”며 “프리랜서였던 청주방송의 고 이재학 PD도 노동자성을 인정받았고, 청주방송 근로감독 결과 라디오 작가 2명도 노동자로 인정됐다”고 밝혔다.

보람을 느끼는 이면엔 고민도 크다. 언제까지 개개인이 “내가 이렇게 노동자처럼 일했다”며 법원에 호소해야 할 것인지, 이런 싸움이 이미 해석의 한계를 두는 법률가들 판단에 종속되는게 아닌지 등의 의문이다. 진재연 사무국장은 “스스로 노동자성을 증명하는 싸움을 넘어서 사용자에 책임 묻는 투쟁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사용자가 누구인지, 어떤 책임이 있는데 지고 있지 않은지를 제대로 얘기하며 투쟁을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김한별 지부장도 개별 투쟁의 한계로 ‘방송사의 꼼수’를 지적했다. “한쪽이 노동자로 인정받으면, 방송사는 다른 작가들에게 확대되는 걸 막기 위해 변칙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1년 넘게 JTBC 아침뉴스 작가로 일했던 김 지부장은 퇴직금 진정을 내 JTBC와 다투고 있다. 그는 “원래 노트북을 비품으로 지급했으나 지금은 지급하지 않는단다. 비품 지급은 법상 근로자 지위 판단 기준”이라며 “올해 처음 도입된 JTBC 작가들 용역계약서엔 아예 ‘예술인이 법상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연차 수당, 퇴직금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갔다”고 꼬집었다.

영화는 종사자들 노동자성이 상대적으로 폭넓게 인정된 분야다. 2019년 대법원은 영화 스태프의 근로자성을 확정했고, 2020년엔 미술감독·현장편집기사·촬영감독·녹음감독 등 감독급 스태프들도 임금 체불 형사사건 1심 재판에서 노동자성을 인정받았다. 다만 홍태화 사무국장은 “일하는 사람 모두가 노동자로 인정받는 세상이 와야 할 텐데, 정부나 여러 제도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를 원한다. 이런 편협한 부분이 철페돼야 한다”며 “영화도 연출감독, 시나리오 작가 등이 아직 법상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는 2019년 서울 불광동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열린  총회에서 영화노조와 ‘방송드라마제작현장 스태프 노동자 노동인권 보장을 위한 공동협약을 맺었다. 김두영 당시 방송스태프지부장(왼쪽)과 안병호 당시 전국영화산업노조 위원장. 사진=손가영 기자출처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는 2019년 서울 불광동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열린 총회에서 영화노조와 ‘방송드라마제작현장 스태프 노동자 노동인권 보장을 위한 공동협약을 맺었다. 김두영 당시 방송스태프지부장(왼쪽)과 안병호 당시 전국영화산업노조 위원장. 사진=손가영 기자

 

영화·미디어 비정규직들 노조하기, 왜 어렵나

용역·파견노동자, ‘무늬만 프리랜서’ 등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구조적으로 ‘노조하기’가 어렵다. 저마다 근무 장소가 다르고, 근무형태도 제각각인 경우가 많으며 고용 자체가 불안정해 위축 효과가 크다.

홍 사무국장은 ‘경쟁’도 구조적으로 부추겨진다고 했다. 그는 “내 옆에 있는 스태프가 경쟁자다. 내가 보다 페이를 낮춰야 하거나, 함께 영화를 시작했지만 뒤에서 서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뭔가를 하게 되기도 한다”며 “전국 영화 학교가 91개, 매년 2700여명 신규 인력이 배출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저 영화 시켜만 주시면 정말 잘 할 수 있다’며 진입하는 이들이 많다.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옆의 동료와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는 문제도 있다”고 설명했다.

방송계 비정규직들은 여론 형성도 어렵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탓에 방송사들이 보도 자체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한별 지부장은 “우리의 사측이 너무나도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삼성급이라고도 생각한다”며 “사회적 여론을 만드는데 방송의 힘은 정말 크다. 그러나 아무리 뭘 해도 가시화되지 않는다. 방송사들은 비정규직 문제를 매번 다루지만 내부 문제엔 눈을 감는다”고 비판했다.

서로 간 연대를 어렵게 하는 요소로 김한별 지부장은 ‘능력주의’를 꼽았다. 김 지부장은 “두 가지 능력주의가 있다. ‘나는 일을 잘하니 저런 부당한 일은 겪지 않는다’는 인식과 ‘내가 부당한 일을 당한건 일을 못해서’라는 자기 귀책”이라며 “이런 생각을 버리면 좋겠다. 노조는 사실 함께 잘살자고 얘기하는 곳인데, ‘우리 안의 능력주의’를 타개한다면 노조 조직과 연대 차원에서 한결 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페이스북 'tvN 혼술남녀에서 신입조연출이 죽었다' 페이지 게시물. 고 이한빛 pd가 쓴 유서내용이 첨부돼있다.
▲페이스북 'tvN 혼술남녀에서 신입조연출이 죽었다' 페이지 게시물. 고 이한빛 pd가 쓴 유서내용이 첨부돼있다.
▲이재학 PD 납골함 앞에 놓인 명예사원증과 명예노동조합원증. 사진=손가영 기자.
▲이재학 PD 납골함 앞에 놓인 명예사원증과 명예노동조합원증. 사진=손가영 기자.

 

미디어 업계 정규직 ‘엘리트주의’ 비판 나와

김기영 지부장은 방송계 내 특유의 ‘엘리트주의’를 지적했다. 대표 정규직군인 기자, PD들이 다른 직군 종사자들과 자신을 위계적으로 구별하는 인식이 팽배하단 지적이다. 김 지부장은 관련해 언론노조에 “외주 PD나 작가들도 PD, 기자와 마찬가지로 자부심을 갖고 일한다. 정규직 조합원의 근본적인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노조 내에 비정규직 지부가 아무리 생긴다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진재연 사무국장은 방송·미디어 비정규직 운동의 성장 조건으로 ‘정규직 연대’를 강조했다. 진 국장은 “얼마 전 상담한 한 프리랜서 노동자의 얘기다. 한 방송계 프리랜서의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승소 기사를 보고 평소 친한 정규직 선배에게 상의했더니 비난을 받고 ‘이기지 못할 것’이란 답을 들었다. 같은 현장에서 같이 방송을 만들지만 계약 형태가 다르다는 이유로 동료로 여기지 않는 상황”이라며 “(언론노조에) 고민하는 활동가분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좀 더 주도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하고,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지만 상황은 바뀐다. 공허한 말을 반복하는 것으론 바뀌지 않는다”고 밝혔다.

언론노조는 이와 관련 ‘미디어공제회’를 고민 중이다. 공제회는 쉽게 말해 회원이 경조사, 건강검진, 소액 신용대출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호부조 기구다. 노조를 설립하기 어려워 당장 단체교섭으로 노동환경을 개선키 어려운 노동자들이 공제회를 통해 생활 속 연대를 형성해보자는 아이디어다.

언론노조는 이를 위해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전태일재단 등의 시민단체와 ‘미디어비정규직공동사업단’을 꾸렸다. 미디어공제회는 내년 5월1일 설립을 목표로 논의를 진행 중이다. 이기범 전략조직실장은 “산별 노조와 정부, 사용자측의 재원 투입으로 공동 기금 마련해 이를 기반으로 공제회를 구성할 것”이라며 “이 힘으로 공동체를 보다 튼튼히 하고, 최저임금 및 생활임금투쟁을 포함해 산별노조에서 함께 사회적 의제를 내세우며 투쟁할 수 있는 청사진을 그린다”고 밝혔다.

비정규직 의제와 관련해 조합원 교육이 이뤄지느냐는 물음에 이 실장은 “기본적으로 두 달에 한번 정도 노조 간부를 교육하는데 그때 비정규직 문제를 계속 각인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덧붙여 “언론직종이 가장 관련 교육이 잘 되지 않는 조직 중 하나일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몸으로 체화되는 게 늦은 측면이 있다”며 “그럼에도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지점들이 있다. MBC 방송작가 부당해고 현안도, MBC노조와 당연히 소통하고, 문제 지점들을 계속 얘기해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2018년 2월, 방송스태프 노조 준비위원들이 처음 모였을 때 회의 내용을 정리한 메모. 개선이 필요한 사항, 요구조건 등이 A4 빼곡히 적혔다. 사진=방송계갑질119
▲2018년 2월, 방송스태프 노조 준비위원들이 처음 모였을 때 회의 내용을 정리한 메모. 개선이 필요한 사항, 요구조건 등이 A4 빼곡히 적혔다. 사진=방송계갑질119

 

“같은 우산 쓰고 장대비와 싸우자” “일단 많이 만나자”

비정규직 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노동자들의 연대는 어떻게 강화해나갈 수 있을까. 김한별 지부장은 “구체적인 공동의 목표”를 말했다. “방송계 종사자들은 방송사를 사용자로 두는 등 공통점이 많다”며 “방송사를 교섭 테이블로 끌어오는 활동을 같이 해본다든지, 방송법 개정 활동을 같이 해본다든지, 목표가 명확하고 구체적이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홍태화 사무국장은 “우산을 같이 쓰자”고 힘줘 말했다. 이와 관련해 영화, 연기자, 무용, 웹툰, 음악 등 문화·예술계 노조 및 종사자 단체 13개가 2017년 구성한 ‘문화예술노동연대’를 들며 가능성을 시사했다. 홍 국장은 “2019년 미국 IASTE 노조가 넷플릭스와 계약서를 두고 교섭을 시작했다”며 “결국 방송이든 영화든 OTT와 멀어질 수 없다. 같이 힘을 합해서 자본과 싸울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 우산을 같이 써야 한다”고 말했다.

진재연 사무국장은 “직군 간 비교 금물”을 강조했다. 진 국장은 고립되거나 소규모로 흩어져 일하는 특성상 “방송 비정규직들이 자신이 처한 열악함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직군과 비교를 잘 하는데 굉장히 마음이 아프다”며 “서로 만날 기회가 없어서다. 방송 비정규직들이 더 많이 만나 소통할 기회를 우리가 만들면 좋겠다”고 밝혔다.

교류를 강화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업무를 줄여보자”고 제안한 이기범 실장은 “여기 계신 분들부터 (노조 하느라) 가장 바쁘고 시간을 쪼개가며 일하는 분들”이라며 시간을 내 교류를 늘려가자고 제안했다. 김기영 지부장도 “정기모임을 정례화해 의무적으로 만나보자”고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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