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4년 4월21일과 30일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었던 이정현 전 의원은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에게 두 차례 전화를 걸었다. 이 전 의원은 세월호 참사 관련 해양경찰을 비판한 KBS 보도를 놓고 거세게 항의했다. 그리고 뉴스 보도 내용을 바꿔 달라거나 빼달라고 요구했다. 두 사람 대화 녹취록을 보면, 정권과 공영방송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나온다. 이 전 수석은 “그래 한 번만 도와줘. 하필이면 또 세상에 (대통령님이) KBS를 오늘 봤네. 한 번만 도와주시오. 국장님 나 한 번만 도와줘”라고 했고, 김 전 국장은 “이 선배 솔직히 우리만큼 많이 도와준 데가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김 전 국장이 통화에서 KBS의 해경 비판 보도 정당성을 피력하기도 했지만, 결국 정권에 비판적인 보도를 하지 말라고 압박하는 정치 권력도, 이를 막아서는 공영방송 보도 책임자도 서로 ‘도움’ 운운하는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 2016년 6월30일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이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보도 개입을 폭로한 통화 내용을 뉴스타파가 재구성해 만든 ‘이정현-김시곤 통화내용(전체)’ 영상 갈무리.
▲ 2016년 6월30일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이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보도 개입을 폭로한 통화 내용을 뉴스타파가 재구성해 만든 ‘이정현-김시곤 통화내용(전체)’ 영상 갈무리.

재판부는 다행히 “누구든지 방송편성에 관해 이 법 또는 다른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떠한 규제나 간섭도 할 수 없다”는 방송법 4조 2항에 따라 이 전 수석에게 벌금형을 내렸다. 재판부 판결은 33년 만에 해당 조항으로 법적 처벌을 내리면서 정치 권력의 보도 개입을 바로잡았다는 데 의미가 적지 않다. 하지만 정치 권력이 공영방송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지배구조 문제가 공고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재판부는 “대통령은 KBS 사장의 임면권자다. KBS 사장은 보도국장 등 소속 임직원에 대한 인사권을 가진다. 그렇다면 보도국장인 김시곤은 청와대 홍보수석인 이정현의 요구가 자신의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통령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판결을 분석하면 정치 권력이 공영방송에 우월한 지위를 갖는 지배구조 하에선 이 전 수석의 전화통화 자체가 ‘압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 권력과 공영방송의 관계를 바로잡지 않으면 이 전 수석과 김 전 국장 사이 비슷한 통화는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여·야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두고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반면, 공영방송 독립성을 보장하는 지배구조 개선 방안에는 전혀 진척이 없다. 공영방송 이사에 대한 여·야 추천 비율을 높이고 사장 선출 시 이사회 찬성 비율까지 높이는 방안, 이사 인원을 대폭 확대하고 다양한 이해집단 대표로 이사회를 구성하는 방안, 국민참여재판 배심원단을 모델로 한 국민대리인단 선출 방안 등 현행 문제점을 개선하는 여러 방안이 제시돼 있다.

▲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8월19일 오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회의실 앞 복도에서 ‘징벌적 손해배상’ 언론중재법 개정안 처리를 규탄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8월19일 오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회의실 앞 복도에서 ‘징벌적 손해배상’ 언론중재법 개정안 처리를 규탄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가 8월23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 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
▲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가 8월23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 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여·야는 국민을 명분으로 ‘언론 보도 피해구제법’이라느니 ‘언론재갈법’이라느니 옥신각신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 권력의 언론 간섭을 막을 수 있는 근본 문제를 계속 외면한다면 겉으로 언론자유 구호를 외치고 기득권만 챙기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하물며 이정현 전 의원도 “나의 사례를 참고로 언론의 자유와 독립이 견고하게 보장되기를 바란다”며 국회에 관련법 점검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남기지 않았던가.

언론자유를 외칠 자격이 특별히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일관성은 있어야 한다. 과거 여·야가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외친 것이 유불리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특히 민주당은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단일안을 도출하지 못하면서 야권에 책임을 돌리고 있는데 언론중재법 개정안에만 빠른 속도를 내는 것에 저의를 의심받기 충분하다. 공영방송 이사, 사장 선임 국면 때마다 되풀이되는 ‘언론 장악’의 악순환. 그 고리를 이제 끊을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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