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의 언론 자유 위축 문제를 다룬 토론회에서 언론이 수사기관의 ‘간첩 몰이’에 종속됐다는 질타가 나왔다.

수사기관의 색깔론이나 표적 탄압, 조작 등으로 무고하게 간첩으로 몰려 처벌받은 사례를 수십 년간 지켜봤음에도 여전히 수사기관에 편향된 보도가 쏟아진다는 것이다. 언론이 국보법의 위헌성과 과잉 적용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지 않는 점이 근본 문제로 지적됐다. 진천규 통일TV 대표는 11일 오후 서울 615남측위원회 사무실에서 열린 ‘언론보도와 국가보안법’ 토론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청주간첩단’으로 알려진 사건이 최근 사례였다. 청주 지역 활동가 4명이 ‘북한 공작원 지령을 받고 미국산 스텔스 전투기 F-35A 도입 반대 등의 활동을 했다’며 지난 2일 3명이 구속된 사건이다. 이후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사건 수사자료 내용이 매일 단독 기사로 보도됐다. “F-35 반대 일당 USB엔 北지령문·충성맹세 혈서 사진”, “충북간첩단, 국정원 요원들 실명도 알아냈다” “‘간첩 혐의’ 청주 활동가들 ‘북한 지령 받고 반보수 투쟁·정당·여성노동자에 접근’“ 등의 헤드라인이다.

지난 5월엔 이정훈 4.27시대연구원 연구위원의 구속과 ‘세기와 더불어’ 출판사 압수수색 사건도 있었다. 이 연구원은 반국가단체 표현물 소지 및 회합·통신 등 혐의로 구속됐다. 세기와 더불어 출판사는 ‘이적표현물’을 제작한 혐의로 수사받고 있다. 세 사건 모두 대공수사권을 경찰에 이관 중인 국가정보원과 경찰의 합동 수사 사건이다.

진천규 대표는 이 사건들을 보도한 언론에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것을, 그들의 말을 충분히 듣지도 않고 어찌 그리 단정적으로 보도하느냐. 대한민국 공권력이 지고지선의, 최고의 판단을 내리는 결정권자냐”라면서 “수십년 전의 인혁당이나 통혁당 사건 모두 재심에서 무죄판결 받았지만 그 시절엔 사형이 선고됐다. 사법살인이었다. 40년 징역 살고 나와 아직 고통속에 사는 이들도 있다. 40년 뒤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면 뭐하느냐”고 물었다.

▲11일 오후 서울 615남측위원회 사무실에서 ‘언론보도와 국가보안법’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손가영 기자
▲11일 오후 서울 615남측위원회 사무실에서 ‘언론보도와 국가보안법’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손가영 기자

진 대표는 자신도 위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언론을 향해 “최근에 가장 많이 방북 취재를 다녀온 사람으로서, 어느 날 갑자기 (정보·수사기관이) 들이닥쳐 나를 가둬 놓고 2~3달 동안 아무것도 없이 ‘진천규 간첩’이라고 했을 때, 여러분 어떻게 보도하실 거냐”고 물으며 “모골이 송연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의 모든 분들이 나의 일이란 생각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색깔론·검열·편견·무지 모두 벗어나야” 제안

토론회 발제를 맡은 원희복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장(전 경향신문 기자)도 언론이 국가보안법에 길들여졌다고 진단했다. 원 이사장은 그 결과를 ‘3맹 9혹’으로 설명했다. 3개의 무지(3맹)는 북한과 미·중·일 등 주변국과 한반도 정치를 모른다는 뜻이다. 9혹은 “북한은 사람 살 곳이 못된다”거나 “한미 동맹은 지고 지선”이라거나 “반공이 정치적 효과가 있다”는 등의 “편견과 환상”을 말한다.

원 이사장은 한국 언론이 자국의 국가보안법에 거리를 두지 못하지만 타국의 국가보안법은 비판한다고도 꼬집었다. 2020년 홍콩에서 국가보안법이 통과될 당시 한국 언론엔 비판 보도가 지배적이었다는 것. 반면 지난 6월 박지원 국정원장이 “국정원이 유관기관과 공조해 간첩을 잡지 않는다면 국민이 과연 용인하겠는가”라며 국보법 존치 주장을 했을 때 이 발언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언론이 거의 없었다는 지적이다.

맹찬형 연합뉴스 통일언론연구소 부소장은 언론인의 자기검열 문제를 지적했다. “언론 보도에 대놓고 국보법을 적용하진 않지만 아이템 선정부터 코멘테이터(취재원) 선정, 기사 내용 작성이나 제목, 데스킹 등에서 검열이 작용한다”며 “‘편향되고 친북적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닌가’라고 문제제기할까봐 스스로 검열하게 된다”며 현 상황을 꼬집었다.

맹찬형 부소장은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보도를 예로 들었다. 당시 제네바의 UN 유럽본부는 각 국가의 국기를 모두 내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기를 게양했다. 이를 본 맹 부소장이 ‘UN 유럽본부 조기 게양’이라고 기사를 썼으나 기사 제목은 ‘조기 게양 논란’으로 수정돼 보도됐다.

대다수 매체가 국가명을 객관적으로 쓰고 있지 않는 점도 예다. 1991년 양국이 UN 동시가입을 했음에도 북한의 공식명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살려 쓰는 매체는 드물다. 맹 부소장은 “공식 명칭이 너무 길면 조선으로, 북은 우리를 남조선이 아닌 한국이라고 부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옳지 않을까”라고 제안했다.

▲4월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폐지 선언 선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국보법 폐지를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4월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폐지 선언 선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국보법 폐지를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원희복 이사장은 “기자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급 취재원에 의존하거나 북에 대한 편견, 사회전반의 보수화 등의 문제를 기자 스스로 타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 이사장은 “기자들이 냉전적 사고를 버리고 평화통일을 이룬다는 신념을 가지면서, 한반도 정치와 관련해 주체적인 시각을 가지는” 평화저널리즘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병호 내일신문 외교통일팀장도 한반도 정치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기자가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장 팀장은 보도가 편향된 이유로 2001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 책임을 묻기 위해 미국에서 열렸던 ‘코리아 전범 재판’을 예로 들었다. 그는 “역사적으로 굉장한 의미를 가진 사건을 연합뉴스만 짧게 단신 처리했다. 국보법과 무관하게 한국 언론 풍토가 한미관계에 대해 성역으로 취급되는 현실을 보여준다”며 “차분히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많아져야 한다. 국민이 알면 바뀌니, 우리부터 공부하고 알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박영흠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 교수는 “젊은 세대 경우 민족주의에 뿌리를 둔 통일의 당위성보다 경제주의적 접근에 따라 분단체제의 평화적 관리를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오랜 반공 교육과 국보법이 요인이라 할 수도 있지만, 기성세대와 다른 역사적 조건 속에서 비롯된 변화기도 하다”며 “평화저널리즘의 내용도 한국의 고유 맥락을 반영해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제훈 한겨레 선임기자는 언론·출판물 개방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국에선 노동신문, 조선중앙통신 등 북측 매체 홈페이지조차 접속할 수 없다. 국가보안법을 이유로 정부가 접속을 차단해서다. 이 기자는 “민주주의에서 정보개방은 매우 중요하다. 매체, 출판물에 대한 개방은 한국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라며 “북한이 ‘괴물’이라거나 접근하면 안 된다는 오래된 인식을 고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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