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충신 최영 장군은 이런 말을 남겼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장군의 이 유명한 레토릭을 빌려 21세기 전환의 시대를 살고 있는 동료 방송인들에게 외쳐본다. 이제 ‘프리랜서’ 보기를 ‘금’같이 하자고.

어쩌면 이번 글은 나 스스로에게 건네는 다짐이기도 하다. 나는 프리랜서(연출보조, 구성작가)로 방송 일을 시작했다. 그 후 PD 공채에 합격해 20년 간 정규직 PD 및 관리자로 일했고, 지난해 방송국이 자진 폐업하면서 다시 프리랜서 생활을 하고 있다. 이처럼 프리랜서와 정규직을 오가는 ‘하이브리드’(?) 인생이 흔한 사례는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전혀 터무니없는 남의 일도 아닐 것이다. 세상은 우리 예측보다 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으니까. 한 때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인 줄 알았던 방송국의 제작시스템, 즉 정규직 PD가 프리랜서 작가와 진행자와 리포터들을 일사분란하게 통제하던, 그런 시스템이 유튜브나 오디오 콘텐츠들에 맞서 압도적 우위를 점한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멀쩡한 사람도 군복 입고 예비군 훈련장에 들어서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이상하게 정규직으로 일할 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프리랜서 눈에는 아프게 느껴지는 경우가 여럿 있다.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인 1997년 겨울, IMF 외환위기가 휘몰아쳤을 때, 아침에 방송국에 출근해보니 그 많던 프리랜서 AD(조연출) 선배들이 아무도 없었다. 구석진 편집실에서 밤샘편집을 하다가 아침이면 모닝커피를 하며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누던 그 쟁쟁하던 선배들이 하루아침에 잘린 것이다. 그것도 전화 한 통에. 5년 넘게 일하며 자기 이름으로 엔딩크레딧이 나오는 드라마나 교양물을 꿈꾸며 실력을 쌓아온 대단한 선배들이 그 날 아침 마치 휴거가 와서 하늘로 증발해버린 것처럼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 조용한 아침의 공포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누군가 놔둔 노보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전 직원 30% 임금 삭감 합의. 그 밑에 조그만 글씨로 제작비는 50% 삭감됐다는 문구가 있었다. 방송국에서 프리랜서의 공식 명칭은 ‘제작비’였다.

가장 힘든 순간은 증빙서류 뗄 때였다. 예나 지금이나 인사과 직원들의 표정은 왜 이렇게 딱딱한지, 간단한 증명서 한 장 떼러갈 때도 쉽사리 입이 안 떨어진다. 몇 번이고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게 된다. 그렇다고 내 맘처럼 서류가 작성되는 것도 아니다. 좀 오래된 방송실적에 대해선 아예 거부당하기도 한다. 방송사 데이터베이스 안에는 프리랜서 구성작가였던 나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버스타고 기차타고 논두렁 밭두렁 다니며 섭외하고 취재해서 대본쓰고 편집실에서 밤새우며 나레이션 원고쓰던 내 청춘은 그곳에 없었다.

▲ 사진=gettyimagesbank
▲ 사진=gettyimagesbank

정규직 PD가 됐을 때는 정반대의 눈으로 프리랜서를 보기도 했다. 윗선타고 들어와 매사에 당당하신 분부터 얄미울 만큼 개인의 권리만 주장하는 이까지… 그러나 아무리 입장이 바뀌더라도 변하지 않는 생각이 있다. 방송은 ‘사람’이 만드는 일이다. 만드는 사람부터 당당하고 행복하면 그 방송을 접하는 시청자들에게도 그런 기운이 전해진다. 존중받는 분위기에서 툭 튀어나오는 프리랜서의 조언이 천금같은 도움을 주기도 한다. 나 또한 국민DJ 오디션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골머리를 싸매던 ‘미션’에 대한 아이디어를 프리랜서들로부터 얻었다.

콘텐츠의 시대라고 한다. 콘텐츠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시사프로그램을 열심히 하며 축적한 이야기로 영화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작가의 가슴속에 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택시 안에서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녹음기를 갖다대는 리포터의 손 끝에 콘텐츠들이 있다. 이들을 발에 채이는 ‘돌’처럼 대하면 콘텐츠는 남의 것이 되어 위협요인으로 돌아오겠지만, 이들을 ‘금’처럼 대하면 콘텐츠는 우리 모두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방송사 비정규직 문제를 단지 노동의 문제나 법적 문제로 볼 게 아니라, 조직의 운명을 뒤바꿀 ‘조직문화’의 차원에서 다시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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