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정치권을 떠들썩하게 한 문건이 있었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정관계 유력인사들에게 16년간 보낸 선물품목과 액수 등이 상세히 적은 기록으로 A4 200쪽이 넘는다. ‘성완종 선물리스트’를 보면 성 전 회장의 선물을 거절한 공직자가 두명 등장하는데 그 중 한명이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다. 2015년 4월 이를 단독보도한 JTBC는 “현직 장관이나 정부 실세 인사들이 기업 회장이기도 한 성 전 회장에게 이런 물품을 받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 성완종 선물리스트에서 노대래 전 공정거래위원장과 함께 선물을 받지 않은 공직자로 등장했다. 시민들이 공직자에게 요구하는 모습이라 관심이 가는 게 사실이다. 보도 당시 김 전 부총리는 국무조정실장을 그만둔 상황이었는데 국무조정실은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이다. 성완종 전 회장이 정무위 국회의원을 지냈으니 김 전 부총리 입장에선 ‘갑’ 아닌가.

“그날 외출하고 돌아와서 JTBC 뉴스를 켜놨는데 성완종 선물리스트라고 보도가 나오더라. ‘선물까지 다 뒤지는구나’ 싶었다. 국무조정실장 비서실에다 선물에 대한 얘기를 했었다. 사적으로 아주 가까워 거절하면 결례인 경우에 양로원 등에 보내달라고 했고, 그 외 다른 것들은 정중하게 사양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성 전 회장은 잘 아는 사이였다. 성 전 회장 선물이라 돌려보낸 건 아니었고, 그 기준에 따라 처리한 것뿐이다.”

▲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지난 13일 서울 광화문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김동연 전 부총리 측 제공
▲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지난 13일 서울 광화문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김동연 전 부총리 측 제공

공직윤리에 대한 이야기로 더 들어가봤다. 김 전 부총리는 이번에 출간할 책과 지난 2017년 쓴 ‘있는 자리 흩트리기’에서 큰아들에 대해 썼다. 김 전 부총리의 큰아들은 그가 기재부 예산실장과 2차관을 거쳐 국무조정실장으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백혈병으로 투병하다 끝내 2013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김 전 부총리는 책에서 “큰 아이가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길을 계속 가고 싶다”며 “무언중에 한 수많은 약속을 지키는 길을 가고 싶다”고 썼다. 

어떤 약속이고 무슨 길인지 물었다. 한참을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우리집 애는 내가 공직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런데 한번도 누구한테 아버지가 누구라고 얘기한 적이 없다. 건장했었고, 장교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국제관계를 전공했고 워싱턴에서 국제기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예전에 쓴 ‘혜화역 3번 출구’라는 글이 있다.” 

2014년 5월4일 당시 박근혜 정부의 국무조정실장이었던 그가 중앙일보에 쓴 글이다. 아들이 떠난지 7개월, 세월호 참사 보름쯤 지난 시점이다. 혜화역 3번출구는 큰아들이 입원했던 서울대병원에 가는, 그에겐 “가슴 찢는 고통을 안고 걷는 길”이다. 그는 “2년여 투병을 하다 떠난 큰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한데, 한순간 사고로 자식을 보낸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하니 더 아프다”라고 참사 희생자들에 공감했다. 

연신 물을 들이켜던 김 전 부총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들이 떠났을 즈음, 원전부품비리 사건이 크게 터졌다. 나는 범정부대책TF 위원장이었다. 발인을 마치고 왔는데 마침 한글날로 휴일이었다. 산자부에서 대책을 이번주 내에 꼭 발표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다음주에 국회 상임위가 열리는데 도저히 배겨낼 수 없다고 하더라. 우리집 얘기를 따로 하지 않았었다. 휴일날 발표문 문안을 수정했고 다음날 발표했다. 한 신문에서 아들 발인날도 일을 했다고 기사를 썼더라. 큰애가 그 상황에서 뭐라고 했을까. 자랑스러운 아버지이고 공직자인데 ‘당연히 하셔야죠’ 했을 거다. 그 생각에 이를 악물고 일을 했다.”

▲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인터뷰로 날 울린 기자는 또 처음이네”라며 눈물을 훔쳤다. 사진=김동연 전 부총리 측 제공
▲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인터뷰로 날 울린 기자는 또 처음이네”라며 눈물을 훔쳤다. 사진=김동연 전 부총리 측 제공

그는 눈시울을 적시며 먼저 떠난 아들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회복이) 힘든 상황일 때 제의를 했었다. ‘곧 좋아질 거야, 아빠랑 책 한번 써보자’고 했다. 아들이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때 상태가 안 좋아 말을 못할 때였는데 웃더라. 책을 쓰면서 큰아이와 함께 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 총장하고 부총리하면서 대화를 많이 했을 거다. 큰아들도 공익에 관심이 많으니까 아빠가 공직 그만둬도 평생 사회에서 받은 혜택을 보답하며 사는 걸 응원했을 거다.” 

아들은 먼저 떠났고, 아버지는 너무 일찍 떠났다. 김 전 부총리가 11살이던 1968년 그의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젊은 배우자와 자녀 넷을 남기고 떠났다. 청계천 옆 무허가 판자촌에 살다 도시정비사업으로 철거민이 돼 광주대단지(경기도 성남시 수정구)로 쫓겨갔다. 가난했던 그는 덕수상고를 나와 열일곱에 한국신탁은행(현 하나은행)에 입사했다. 1977년 야간대인 국제대학에 진학했고, 1982년 입법고시(수석)에 합격해 잠시 입법조사관으로 일하다 행정고시에도 붙어 경제관료가 됐다. 
 
- 흙수저, 상고 출신이다. 관료 생활, 공익적인 일을 하면서 가난의 경험은 어떤 의미였나? 또는 어떠한 걸림돌이었나?

“지금은 다 지났으니 좋게들 얘기를 한다. 내 인생의 암흑기를 묻는다면 남들이 청춘이라 부르는 그 시기가 암흑기라고 했다.”

김 전 부총리는 ‘지금의 내가 스무 살 초반 나와 우연히 조우한다면’이란 시를 쓴 적이 있다. “아, 불쌍한 젊은 영혼// 스무 살 초반 나와 어느 길거리에서 우연히 조우한다면/ 아무 말도, 아무 내색도 않고/ 잠시 눈길을 주다가/ 돌아서서 남 몰래 울면서 그냥 내 길 갈거야” 열등감에 빠져있던 젊은 ‘나’를 연민하는 내용이다. 정치인 김동연의 흙수저 스토리가 미화되더라도 가난의 흔적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20~30대 시절 내 속에 있는 여러 감정 중 가장 큰 걸 하나 끄집어내면 ‘열등감’이었다. 누가 학교 어디 나왔냐고 물어 답을 하면 ‘별 희한한 학교 나왔네’하는 반응이었다. 지금이야 웃으며 얘기하지만 너무너무 힘들었다. 긍정적인 면을 말해보자면, 옛날 얘기하면서 ‘위장된 축복’이란 말을 썼다. 34년 공직에 있으며 정책을 다뤘고, 박사 전공은 정책결정론이다. 정책의 대상, 수혜자인 국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한다. 밥 한번 굶어보지 않은 사람, 집에 돈이 없어 병원을 못 가본 사람을 대상으로 ‘쌀이 없으면 떡을 먹어야지’라고 할 순 없지 않나. 명문대 나와서 엘리트코스 밟은 사람들이 교육격차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지난 13일 서울 광화문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김동연 전 부총리 측 제공
▲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지난 13일 서울 광화문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김동연 전 부총리 측 제공

- 엘리트코스만 밟은 관료와 보는 게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예산실 국장 때 일이었다. 명절 때 불우이웃돕기 행사가 있으면 보통 사무관이 가서 봉투를 주고 온다.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에 있는 홈리스 수용시설이었는데 내가 직접 가겠다고 했다. 사실 그분들도 형식적으로 온 거 다 안다. 차 한잔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내가 여긴 예전에 뭐가 있었고 그땐 허허벌판이었다며 얘기를 하다보니 그걸 어떻게 아는지 묻더라. 청계천 무허가 판자촌 살다 강제이주돼 온 게 옆동네라고 했다. 그 얘기를 하니 달라지더라. 부총리 그만두고 지방을 많이 다녔는데 농촌, 어촌 다녀보면 그분들이 금방 안다. 형식적으로 사진 찍으러 온 건지 아닌지. 밑바닥까지 가본 경험, 긍정적으로 일어선 의욕이나 근면성도 도움이 많이 됐다.”

- 대학총장직을 관둘 때 학생들이 ‘갓동연’이라는 팻말을 들고 있던데,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정책도 있었나?

“애프터유(After You)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집안이 어려운 학생 150명을 방학 때 해외로 보냈다. 여유있는 집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의 가장 큰 차이가 해외 경험이다. 학생을 선발할 때 학교성적과 어학성적은 안 봤다. 부모소득과 관련이 많지 않나. 특히 어학성적은 그렇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지, 본인이 공부하려는 의지가 있는지만 봤다. 150명 중 20%(30명)는 타교 학생을 뽑았다. 계층이동 사다리의 정신은 학교 밖으로도 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SOS(Save Our Student) 프로그램도 있었다. 학비는 장학제도가 있으니 생활비를 지원하는 제도다. 학교에서 반대했다. 요새 그 정도 어려운 학생 없고, 있어도 낙인효과 때문에 안 한다고 했다. 그래도 해보자고 했다. 난 초등학교 때 아버지 돌아가셨고, 중학교 때 등록금 못 내서 쫓겨났는데 요새도 그런 학생들 있지 않겠나.” 

김 전 부총리는 자신의 월급의 일부와 외부 강연으로 번 돈까지 학생들에게 썼다. 학내에서 회의적이던 정책을 추진해낸 건 단지 그가 총장직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련 기사 : 김동연 “아래로부터의 반란 필요해”]
[관련 기사 : 김동연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한국사회 전쟁터”]

▲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지난 13일 서울 광화문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김동연 전 부총리 측 제공
▲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지난 13일 서울 광화문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를 마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김동연 전 부총리 측 제공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