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현우의 시사 용접소] 배 위의 삶, 배 아래의 삶
[천현우의 시사 용접소] 배 위의 삶, 배 아래의 삶
아무렇지 않게 누린 서비스 내부를 조금만 들여다봐도

서울대학교 청소 노동자가 돌아가셨다. 이번이 두 번째다. 많은 사람이 분개하며 이를 가는 와중에, 학생처장이라는 분은 자기 책임을 ‘외부 정치 세력’, ‘흑백 진영논리’로 얼버무린다. 기획 시설부 관장이라는 분도 ‘마녀사냥’, ‘갑질 프레임’ 운운하며 노동자의 무덤에 침을 뱉는다. 이분들은 ‘일하다 죽는다’라는 상황 자체에 공감할 수 없어 보였다. 화가 나기보단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배 위에서 살아가던 이들이 배 아래에서 사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게 대한민국 사회 구조다.

배 위의 삶

한국 사회라는 커다란 배는 시험 한탕주의로 돌아간다. 편한 삶을 살고 싶다면 배 위에 올라타야 한다. 일단 갑판에 안착하기만 하면 삶이 달라진다. 당장 청년들이 공무원 시험에 왜 목숨 걸겠는가?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직업을 보장받는다. 받는 돈은 저절로 오르고 시간 지나면 알아서 승진이 이뤄진다. 위험에 처하면 노조가 힘을 모아 지켜주기까지 한다. 심지어 정년퇴임 후 굶어 죽을 일조차 없다.

교수 역시 매우 안정적 직업 중 하나다. 사회적 지위도 높고 자율성의 폭 또한 넓다. 물론 그들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누구보다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배 위에 한 번 올라탄 이후부턴 늘 안전한 환경에서 살아왔을 터. 품격 있고 안온한 삶을 보장받은 이들은 배 아래의 삶을 사는 이들의 ‘쪼들림’을 망각한다. 간혹 매체에서 배 아래의 삶을 다루면 ‘아, 힘들겠구나’ 생각은 하겠지만 그뿐. 본질까지 다가가지 못해 공감에 실패한다. 그러다 결국 배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조차 잊고 만다.

▲ 사진=gettyimagesbank0
▲ 사진=gettyimagesbank0

배 아래의 삶

배 위에 올라탈 수 있는 사람들은 많게 잡아 20%밖에 되지 않는다. 자연스레 대다수가 배 아래에서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하는 신세가 된다. 몇몇은 선상으로 나가기 위해 노 저은 삯을 털어 재도전하기도 하지만 녹록지 않다. 오롯하게 시험만 준비할 수 있는 이들보다 훨씬 불리한 입지로 시작하기에 세상은 이들이 선상에 올라간 사건을 개천용이 난 경우로 취급한다.

배 아래의 삶은 배 위의 삶을 뒤집어 놓은 모양새다. 입지는 늘 불안한 데다가 임금이 절로 오르기는커녕 실력을 쌓아도 연봉이 제자리에서 논다. 지켜 줄 노조도 없고 정년 이후에도 굶어 죽을까 아등바등 일자리를 찾는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사회의 냉소와 무관심이다. 명백한 다수인데 언론에선 소수처럼 다룬다. 기껏 사연을 전달할 기회를 잡아도 실존하는 사람이 아닌 비극의 배우로 취급당한다.

이번 사망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분노와 연민이 떠돌아다니는 와중에 실사구시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무의미한 시험을 봤다던가 대학 측에서 갑질을 했다든가 하는 보도가 나오며 사건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고 있다. 저런 문제도 심각하지만 최우선으로 밝혀내고 개선해야 할 사항이 아니다. 노동자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청소 노동의 업무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건강 관리나 검진 등은 제대로 이뤄지는 건지, 사망에 이르게 할 만한 위협 요소는 무엇인지, 세 번째 비극이 나오지 않기 위해 어느 영역부터 손을 봐야 하는지 꼼꼼히 훑어보는 것이다.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및 유족 등이 지난 7월7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청소노동자 A씨 사망과 관련해 오세정 서울대 총장을 규탄하고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노컷뉴스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및 유족 등이 지난 7월7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청소노동자 A씨 사망과 관련해 오세정 서울대 총장을 규탄하고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노컷뉴스

우리가 외면해왔던 현실

회사에 청소 노동자를 따로 두기에 뵐 기회가 있었다. 온종일 장갑을 꼈던 손은 습기 때문에 온통 터 있었다. 손바닥은 굳은살이 촘촘하고 손톱도 쩍쩍 갈라진 채로 두꺼워져 못 볼 꼴이었다. 직장 안에선 냄새 풍길까 두려워 사람을 피해 다니고, 밖에선 돈도 별로 못 벌어 사람을 많이 못 만나다 보니 자존감도 많이 낮아져 있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누렸던 서비스 내부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런 비참한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할 쯤 페이스북 서울대 대나무숲 페이지엔 ‘서울대 청소노동자의 기회비용’이라는 글이 올라와서 공분을 샀다. 경제학개론 뗀 지 얼마 안 된 듯한 학부생이 어설픈 학술 용어를 써가며 이번 사망 사건을 ‘서울대 아니었으면 논쟁거리도 안 될 사안’이라는 식으로 글을 썼다. 저 학교 청소 노동자들은 이런 철부지마저 ‘내 새끼들 같아서 뿌듯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훈계는 하지 않겠다. 다만 일개 노동자인 나도 아는 유명한 슬로건 하나만 비틀어 돌려드리겠다.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근데 그 전에 고개를 숙여 노동자부터 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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