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천의 구석구석을 걸으며 놀이터를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벌써 6개월째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내 다섯 개의 놀이터는 10년 전까진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구성과 테마가 달라 고르는 재미가 있었다. “오늘은 공룡 놀이터 갈까?” “지네 놀이터에서 만나!” 그런데 놀이터를 상징했던 놀이기구가 철수되었다. 대신 죄다 똑같은 소재와 크기, 빨갛고 파랗고 노란 플라스틱 놀이기구가 들어섰다. 가장 넓었던 놀이터는 크기가 반에 반으로 줄었다. 이제 이 놀이터는 주차장이 됐다. ‘안전제일’ 이라는 플라스틱 위험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상태로 말이다.

놀이터에서 내 방보다 오랜 시간 머물렀던 만큼, 놀이터는 어린 시절 기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지금까지도 내 양 손 중지 손가락에는 노란 굳은살이 촘촘히 박혀있다. 철봉에 하루 종일 매달려 있으며 생긴 흔적이다. 까맣고 축축한 모래를 파서 10원짜리 100원짜리 동전들을 모았다. 낯선 또래와 어울리며 놀이를 만들고 관계를 맺었다. 엄마는 너무 오랜 시간 놀이터에 있는 나를 걱정했다. “김밥 말아줄 테니까 빨리 들어와!” 8층 베란다에서 나를 유혹하기도 했다.

단순히 기억 속 공간을 잃어버렸다는 아쉬움에서 사진을 찍는 건 아니다. 어린이들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놀이터로 첫 놀이 공간을 경험한다. 안전하지만, 놀이터의 구성이 부족하고 열악한 상황은 어린이를 배려한 공간이 아니다.

▲ 놀이터. 사진=이혜원
▲ 놀이터. 사진=이혜원
▲ 놀이터. 사진=이혜원
▲ 놀이터. 사진=이혜원

국제사회에서 채택된 아동권리선언에서조차, 아동이 “놀이와 여가시간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아동이 영아기부터 주도적으로 자유롭게 놀이를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지시한다. 따라서 정부와 지역사회는 어린이 놀 권리의 공공성을 보장하기 위해 책임을 다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잘 ‘갖춰진’ 놀이터가 놀 권리를 보장하는 건 아니다. 일본은 이러한 도시환경이 어린이의 놀 권리를 박탈했다는 인식 아래 약 30년 전부터 학교에서 금지한 웅덩이 파기, 모닥불 놀이, 나무 타기 등 자유로운 놀이시설을 조성하고 있다.

최근엔 놀이의 개념이 키즈카페, 체험학습, 놀이학교 등으로 변해 상업적인 측면과 교육적인 측면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또, 유튜브 등을 보며 집에서 놀이를 대신 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심지어 코로나19 상황으로 놀이터가 텅텅 비어있을 때가 더 빈번하다. 이러한 흐름은 부모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차이로 인한 놀이경험의 차등을 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어디에 태어났더라도 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놀이의 감각은 스무 살이 훌쩍 넘고 몸이 커버린 내게도 소중한 감각이다. 낯선 사람을 만날 일도, 새로운 공간에 갈 일도 줄어든 요즘은 더더욱 그렇다. 때론, 처음 만난 애와 친구가 되고 세상에 없던 놀이를 만들어 해가 지도록 놀았던 그 때가, 풀을 빻으며 계절의 변화를 가장 빨리 알아챘을 그 때가 세상과 더욱 적극적으로 소통했던 게 아닌가 싶다.

현재 부천시는 3기 신도시 개발의 일환으로 대장동 신도시 개발을 앞전에 두고 있다. 부천의 녹지를 맡고 있는 대장동은 앞으로 내가 사는 중동 신도시처럼 아파트와 오피스텔, 백화점과 대형마트 등으로 밤새 반짝이고 시끄러워질 것이다. 또 누군가의 놀이공간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놀이터에서의 ‘생생하고 살아있는 경험’은 도시의 개발로 인해 누릴 수 있는 수많은 편리보다 소중하다. 그래서 난 놀이터 안전신화를 거부하며 놀이터에서 수많은 만남과 관계가 엮이고 감각이 자극되는 ‘평범했던’ 일상을 꿈꾼다.

▲ 놀이터. 사진=이혜원
▲ 놀이터. 사진=이혜원

이혜원은 다큐멘터리를 전공하며 자유롭고 틀에 갇히지 않은 시선으로 20대 청년들의 삶과 세상을 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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