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성소수자 인권의 달’을 맞아 기업의 성소수자 지지 이벤트 불모지인 한국에서도 다양한 젠더 정체성을 응원하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의 인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미디어 플랫폼의 경우 소위 ‘토종’ 기업들의 외면이 여전하다.

‘성소수자 인권의 달’은 1969년 6월28일 미국의 술집 ‘스톤월’에서 성소수자들이 폭력적인 경찰의 진압에 맞선 항쟁과, 이듬해 그 1주년을 맞은 행진을 계기로 시작됐다. 명칭은 1주년 행진을 기획한 성소수자 운동가 브렌다 하워드의 별명’(Mother of Pride)에서 유래했는데, 한국에선 영어 발음을 따른 ‘프라이드 먼스’ 또는 ‘자긍심의 달’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6월이면 이를 반대하는 성소수자 혐오 단체와 주최측 충돌이 언론·미디어를 통해 부각됐다.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직접 참여하거나 후원·이벤트를 진행해온 해외 유수의 기업들과 달리 국내 기업들은 성소수자 단체와 연관되길 꺼렸다.

▲SC제일은행 인스타그램 갈무리
▲SC제일은행 인스타그램 갈무리

그나마 최근 외국계 기업을 중심으로 젠더 다양성을 지지하는 메시지가 나오고 있다. 지난 1일 스탠다드차타드그룹을 모기업으로 둔 SC제일은행이 국내 시중은행으로서 최초로 성소수자 인권의 달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전하며 SNS 이벤트를 진행했다. 2019년 무지개빛 ‘카스’ 광고를 선보인 OB맥주도 벨기에 AB인베브에 매각된 기업이다. 이들 기업 행보에 환영과 함께 ‘외국계라 가능했다’는 반응이 따라붙은 이유다.

미디어 업계도 전반적인 사정은 다르지 않다. 오디오 플랫폼 중에서는 지난 2월 한국에 상륙한 ‘스포티파이’가 ‘프라이드 허브’를 런칭했다. 성소수자 아티스트들이 참여하거나 선별한 음악을 플레이리스트로 제공하는 서비스다. 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퀴어·인터섹스·에이섹슈얼 등 다양한 젠더정체성을 가진 이들(LGBTQIA+)과 관련해 “음악이 어떻게 표현의 수단이 됐고, 주류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명한다는 취지다.

세계 최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기업인 ‘넷플릭스’는 국내에서도 6월 한달 ‘LGBTQ의 달 기념 콘텐츠’ 큐레이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평론가 호평을 받은 LGBTQ 영화와 TV 프로그램 △LGBTQ 감독들 △LGBTQ 다큐멘터리 △판타스틱 드래그 컬처 △가족과 함께 보는 LGBTQ 이야기 등의 소주제를 기준으로 다양한 동영상 콘텐츠를 소개한다.

국내 OTT 중에서는 ‘왓챠’가 ‘#PRIDEMONTH’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퀴어 영화 컬렉션’을 제공하고 있다. ‘LGBTQ’ 등의 키워드 검색을 통해서도 퀴어 관련 콘텐츠를 볼 수 있다. 왓챠의 콘텐츠 평가·추천 서비스인 ‘왓챠피디아’에서는 다양한 젠더정체성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콘텐츠, 이와 관련된 소재를 다루는 콘텐츠들을 선별한 추천 리스트를 볼 수 있다.

여성영화 전문 OTT ‘퍼플레이’도 ‘프라이드 먼스를 퍼플레이와 함께’ 섹션을 만들었다. “‘남자친구’, ‘여자친구’에 대해 계속해서 묻는 사람들, 그것도 모자라 TV와 극장을 점령한 시스젠더 헤태로 로맨스들에 질릴대로 질린 당신이라면 이곳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퍼플레이에선 ‘성평등&다양성’ 카테고리에서도 관련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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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왼쪽)와 스포티파이 '성소수자 인권의 달' 기념 큐레이션

반면 한국의 미디어 기업들이 운영하는 OTT에선 성소수자 인권의 달을 맞은 이벤트는커녕 성소수자를 소재로 다룬 콘텐츠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국내 기업이 운영하는 2~4위권 OTT 플랫폼에서 ‘프라이드(pride)’ ‘LGBT’ ‘성소수자’ 키워드로 콘텐츠를 찾아봤다.

지상파 방송사(KBS·MBC·SBS)와 SKT 합작으로 만들어진 ‘웨이브’에선 ‘LGBT’ 관련 영화 2건, ‘프라이드’ 관련 영화 2건이 나왔다. ‘성소수자’ 키워드를 통해서는 방송사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방영분 4회차 및 영화 5건이 검색됐다.

CJ ENM ‘티빙’의 경우 ‘프라이드’ 관련 영화 1건, ‘성소수자’ 키워드로 검색했을 땐 KBS대전총국의 유튜브 숏다큐 ‘다큐5분 달그릇’ 정도다. LG유플러스의 ‘U+모바일tv’와 KT ‘시즌’은 ‘프라이드’ 키워드로 찾을 수 있는 영화 1건이 전부였다.

이는 성소수자 콘텐츠가 빈약한 한국 미디어의 현실이기도 하다. 고려대 다양성위원회의 지난달 발간물(Diversitas)에서 박지훈 미디어학부 교수는 “성소수자의 과소재현은 성소수자들이 우리 주변에 없는 존재 취급을 당하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고 밝혔다. “성소수자 관련 의제가 다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성소수자의 자유와 인권에 관한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기 어렵게 된다”는 우려다.

이종걸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은 성소수자 관련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통화에서 그는 “이전에도 성소수자가 등장하는 콘텐츠가 없었던 건 아니다”라며 “이미 있던 것과 새로운 것들을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하면 성소수자 인권 증진과 함께 소수자 삶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이해도를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이어 “(성소수자는) 자사 구성원일 수도 기업의 생산물을 이용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면서 “국내 기업들의 지지 행위가 매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게 필요한 것 같고, 사실 반대 여론이 있다고 하더라도 문화·미디어 매체로서는 문화 다양성을 더 적극적으로 알려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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