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어느 저녁 식사 자리에서 취업난을 호소하는 20대 청년과 마주한 적 있습니다. 그의 갈 곳 잃은 푸념 앞에 저는 효능 없는 위로만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그가 말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언론사 말고는 지원해 본 적 없어요. 기자가 꼭 되고 싶거든요.”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그런 말을 하기에 이유를 묻자, 간명한 답이 돌아왔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요.” 그랬습니다. ‘언론’은 여전히 이 사회가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데에 힘을 보태고 싶은 사람들이 찾는 직업이었습니다.

그 언론이 요즘 수난을 겪고 있습니다. ‘기레기’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입니다. 물론 언론종사자들의 책임이 큽니다. 하지만 그 언론을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의 날선 에너지가 과연 올바른 대상을 향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이른바 ‘기레기 사냥’에 열중하는 것만으로 과연 언론개혁이 되겠는가 말입니다.

먼저 생각해 봅시다. ‘좋은 기사 칭찬하는 일’과 ‘나쁜 기사 욕하는 일’ 중 무엇이 더 쉬울까? 아무래도 후자가 더 쉬울 겁니다. 나쁜 기사가 좋은 기사 보다 훨씬 더 쉽게 찾아지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나쁜 기사는 눈에 잘 띕니다. 대중의 관심이 들끓는 소재에 대해 자극적인 제목과 사진을 동원해서 쓰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조회 수를 목적으로 쓰여지거나 특정 결론에 맞추어 기획된 기사라, 취재에 공을 들일 필요가 없고 세세한 팩트체크도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내용이 짧고 어렵지 않아 잘 읽힙니다.

하지만 좋은 기사는 모든 면에서 반대입니다. 대중의 관심보다는 보도 가치를 좇고 자극적인 제목과 사진도 동원하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면밀한 취재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쓰여지다 보니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고,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하기에 내용도 길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재미와 가독성 면에서 좋은 기사는 나쁜 기사와 경쟁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그래서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은 기사 칭찬하기’ 보다 ‘나쁜 기사 욕하기’에 더 열중하는 이유는 단지 그게 더 쉽고 재밌기 때문입니다.

사진=gettyimages.
사진=gettyimages.

그러면 이것도 생각해 봅시다. ‘좋은 기사 칭찬하기’와 ‘나쁜 기사 욕하기’ 중 무엇이 더 우리 사회에 필요할까? 전자가 훨씬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쁜 기사의 해악보다 좋은 기사의 선한 영향력이 훨씬 더 큰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나쁜 기사들은 대개 대충 쓰여집니다. 면밀한 취재나 정연한 논리, 구체적인 근거 따위 없습니다. 언론의 상업성·정파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식 수준이 이미 많이 높아서, 독자들로서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어떤 기사가 단지 조회수 장사에 몰두하거나 정해진 결론에 끼워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나쁜 기사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수십 개 모여봤자 듣기 싫은 소음 정도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하지만 좋은 기사는 단 한 개만 탄탄하게 쓰여져도 송곳처럼 제 역할을 합니다. 예컨대 어떤 고위 공무원이 심각한 비리를 저질렀다면, 탄탄한 취재와 근거로 무장된 단 한 개의 기사만으로 그를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나쁜 기사 욕하기’에 몰두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그 나쁜 기사의 효능을 높이게 된다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특정 시기에 비슷한 내용으로 쏟아지는 나쁜 기사들은 기사 내용을 알리려는 목적보다는 기사에 언급되지 않은 진실을 은폐하려는 목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지난해 6월, 어느 재벌 총수의 생일에 세탁기 앞에 쪼그려 앉은 그의 사진이 언론에 도배된 까닭은 그의 현장 경영(?)을 알리려는 목적보다는 사회적으로 더 논란이 되어야 할 그의 범죄사실을 감추려는 의도가 컸을 것입니다.

[관련 기사: ‘이재용 프로포폴 상습 투약’ 새로운 목격자, 언론은 외면]

▲뉴스타파
▲뉴스타파 2020년 2월 보도 화면. 

지난해 10월, 특정 지역 언론들이 어느 건설회사에 대한 홍보성 기사를 쏟아낸 까닭은 그 회사 건설 현장에서 노동자가 사망한 사고를 은폐하려는 목적이 커 보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그 기자들에 대해 “기레기다”, “광고 찌라시나 쓰고 있다” 비판하며 정작 그 총수의 범죄사실과 그 노동자의 사망 사고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해당 회사들로서는 정확히 원했던 바를 얻게 됩니다.

[관련 기사: 故정순규씨 1주기 맞춰 올라오는 경동건설 청약 기사들]

그래서 저는 언론 개혁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좋은 기사 칭찬하기’ 보다 ‘나쁜 기사 욕하기’에 훨씬 더 몰두하는 모습이 대단히 우려스럽습니다. 그들의 에너지가 더 쉽고 재미있을 뿐 더 유용하지는 않은 일에 지나치게 몰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나쁜 기사를 기획하고 생산하는 자들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어쩌면 언론 현실이 이대로 고착되길 바라는 누군가가 지금의 ‘기레기’ 열풍을 더 과열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임자운 변호사. 사진=이치열 미디어오늘 기자.
▲임자운 변호사. 사진=이치열 미디어오늘 기자.

며칠 전 어느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어느 현직 기자와 마주했습니다. ‘기자’라는 직업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그에 부끄럽지 않은 기사를 쓰기 위해 늘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여러 푸념을 늘어놓다 문득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근데요. 실은 제일 문제가 뭔지 아세요? 기자 일이 더 이상 재밌지 않다는 거에요. 예전에는 몸이 힘들어도 일이 싫지는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좀 싫어지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며 저는 지난해 맑은 눈으로 “선한 영향력”을 말했던 그 20대 청년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다행히 어느 언론사의 기자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일을 하게 되었으니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취재 현장을 뛰어다니고 있을 겁니다. 몸이 힘들어도 일이 싫지는 않겠죠. 하지만 공들여 쓴 기사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자신의 기사는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 의해 한통속의 ‘기레기’로 매도당할 때, 그런 상황에서도 그 열정이 계속 숨쉴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선한 영향력을 신념처럼 여기며 저널리즘 원칙에 충실하려는 사람들. 그들이 소진되고 무기력해지는 상황이 우리 언론의 ‘진짜’ 위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레기 사냥’에만 열중하며 정작 좋은 기사 찾아 읽고 널리 알리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쩌면 언론이 개혁되기 전에 그 ‘언론’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