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야/ 나는 분명히 그의 앞에 절을 했노라/ 그의 앞에 엎드렸노라/ 모르는 것 앞에는 엎드리는 것이/ 모르는 것 앞에는 무조건하고 숭배하는 것이/나의 습관이니까”

김수영의 시 ‘누이야 장하고나’의 일부다. 이 구절에서 장례식 장면이 떠오른다. 많은 이들이 장례식장을 찾지만 정작 고인을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인을 잘 몰라도 상관없다. 심지어 영정사진 한번 제대로 보지 않은 채 빠르게 절을 하고 돈을 전달한 뒤 장례식장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사회생활의 일부니까, 지인의 친족이니까, 우린 누군지도 모르는 사진 앞에 익숙하게 엎드린다. 

유족들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있다. 고인이 즐겨 듣던 음악을 틀고 좋아하던 음식을 준비해 추억할 수 있을까. 정작 그가 가장 보고싶어 하던 사람은 누군지, 오히려 가족이라서 많은 부분을 잘 모른다. 장례절차와 조문방식을 다 정해놓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무얼 준비하고 서로 어떤 말을 하며 얼마나 시간을 보내야 할지 조문객들이나 유족이나 서로 난감할 테니 말이다. 

문제는 기존 장례절차가 낡았다는 점이다. 가부장 문화와 ‘정상가족’의 틀대로 제도화됐기 때문에 장례는 차별적이다. 이를 짚어본 책이 있다. ‘사과집(‘사소한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기’의 준말)’이라는 필명의 작가가 쓴 저서 ‘딸은 애도하지 않는다’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뒤 알게 된 아버지와 남은 가족들의 달라지는 삶에 대해 담았다. 

▲ 딸은 애도하지 않는다/ 사과집 지음/ 상상출판 펴냄 
▲ 딸은 애도하지 않는다/ 사과집 지음/ 상상출판 펴냄 

 

저자는 아버지 죽음 이후 여러 번 실망했다. 먼저, 영혼 없는 장례업체의 일처리. 성복제, 발인제, 봉분제 등 처음 듣는 복잡한 장례절차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일단 진행해야 하니 지갑을 열어야 한다는 투였다. 장례절차가 이렇게 복잡한지 이전엔 몰랐다. “이 장례식장의 모토는 ‘고인을 잘 보내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인 것 같았다”(20쪽) 마치 정해진 코스를 밟지 않으면 마지막 예의가 아닌 것 같은 그 심리를 장례업체에선 잘 이용(?)하고 있었다. 

장례의 당사자는 고인과 유족이지만 장례식을 주도하는 건 장례업체다. 그렇게 존중받아야 할 유족들은 장례식에서 소외됐다. 그중에서도 딸은 가부장적 질서로 또 배제됐다. 

“상주 완장은 사촌 오빠가 찼다.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사촌 오빠가 나 대신 내 아빠의 상주가 된 것이다. 온갖 결정은 내가 내렸지만, 아빠를 보내는 예식은 다른 사람의 몫이었다. 장례식장에서는 평생 같이 산 직계존속보다도 남자를 선호한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았다.”(21쪽) 

“장례식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남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186쪽)이었고 저자는 “‘여자아이’ 취급”(22쪽)이나 받았다. 장례식은 남녀차별이 여전하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공간이다. 

장례식장에선 향초가 꺼지지 않도록 한다. 누군가는 10분에 한번씩 향초에 불을 붙여야 했다. 저자에게 “치성을 드리면 아빠가 잘 떠나리라는 믿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뒤늦은 친절”이었고 “절에 가서 치성을 드리거나 몇 번의 제사를 치르는 것도 여성 노동력을 볼모로 하는 구복 신앙”(109쪽)으로 보였다. 

저자는 이런 부담스러운 장례가 아닌, ‘나’의 장례를 상상했다. 비혼으로 살기로 했으니 동생이 자신의 장례를 주관해야 할 수도 있다. 동생 혼자 충분히 날 배웅할 수 있는 애도법을 준비해보기로 한 거다. 일본의 사례도 참고했다. 

일본 도쿄 신주쿠구에는 고코쿠지라는 절이 있다. 이곳엔 불상이 LED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는 납골당 ‘루리덴’이 있다. 어두운 분위기가 아닌 밝은 분위기로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을 포함해 “망자를 책임질 수 있는 자식이 없어도 절이 끝까지 유골을 책임”(39쪽)지는 곳은 더 있다. 도쿄 마치다시에는 친구들과 같이 묻히는 ‘벚꽃장’도 있다. ‘묘지 친구’와 함께 잠들 수 있다. 사이타마현에는 여성만을 위한 공동묘지 ‘나데시코(패랭이꽃, 일본에서 여성을 비유하는 표현)’도 있다.

▲ 사진=pixabay
▲ 사진=pixabay

 

저자는 “육개장을 먹지 않아도, 남자 상주가 없어도 존엄하게 떠날 수 있는 장례식. 애도가 중심이 되는 간소화된 장례식. ‘나 없는 송별회’가 이루어지는, 조금은 산뜻한 애도의 장”(41쪽)을 준비하기로 했다. 

이전에는 혈연가족 중심의 장례문화의 문제점이 나오면 생활동반자법 등 사회적 제도를 마련하도록 목소리를 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질문은 좀 더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변했다. ‘1인가구를 정책적으로 고려하고 돌봄의 사회화가 필요하다’는 답에 공허한 면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은 빠져있다”(196쪽)는 이유에서다. 

우리 모두 돌봄 노동을 수행하거나 돌봄 노동을 받게 될 수 있지만 그런 돌발상황을 인생의 변수로 놓지 않는다. 만약 가족이 치매에 걸렸거나 자신이 치매에 걸린다면? 저자는 알라나 샤이크의 ‘어떻게 나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준비를 하고 있는가’라는 TED강연 등을 예로 들었다. 핵심은 “혼자할 수 있는 일이 줄었을 때를 위한 준비, ‘돌봄을 더 쉽게 만들 수 있는 몸’을 만드는 일”(197쪽)이었다. 이러한 질문은 삶의 예상치 못한 변수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한다.

죽음을 삶의 변수로 고려하면 삶의 태도를 바꿀 수 있다. 저자는 잘 몰랐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 건강에 관심이 없었던 가족들이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을 기록했다. “아빠의 죽음은 우리 가족의 미래를 재설계토록 자극하는 전환점이 되었다.”(143쪽) 현재의 삶 뒤편에 죽음을 덧대어보면 삶의 유한함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더 나은 죽음도 결국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시간 속에서 가능하다. 

한편 이 책에선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권리와 제도도 고민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아버지에 대한 사생활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즐기던 음식, 어떤 사람이었는지부터 애인의 존재와 같은 것들이다. 특히 온라인 공간에는 많은 개인정보가 남아있다. 

저자는 2016년 한 실태조사를 인용하며 쪽방 거주인의 약 70%가 가족 등 법적 연고자 중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고 지낸다고 했다. 자신이 죽더라도 법적 연고자에게 연락이 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법적으론 혈연에게 연락이 가게 된다. 삶을 추정할 수 있는 정보들이 자연스레 알려지게 되고 점점 온라인에 많은 정보도 알려지게 된다. 

예고 없이 가족이 죽으면 어디까지 알려야 할까. 살면서 고인과 본적도 없는 친척들까지 연락이 갈 수 있다. 온라인상에선 친했지만 오프라인에선 연결고리가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는 게 맞는가. SNS로만 연결된 이들에겐 사망소식을 알려야 할까. 아니면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저자의 필명대로 사소한 것에 대한 집착처럼 보이지만 매우 현실적이고 풀기 어려운 고민들이다. 

또한 죽은 이의 사생활이 공개되지 않을 권리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일본에서 자살을 많이 하는 어느 해안에는 “잠깐만요. 하드디스크는 깨끗하게 지우셨나요?”라는 푯말이 있다고 한다. 일단 자살을 멈추고 컴퓨터 앞으로 돌아갈 만하다. 

저자도 죽음 이후를 상상했다. “죽고 나서 내 맥북이 가족에게 넘겨진다면 어떨까? 아이클라우드에 연동된 수천 개의 메모를 본다면? 만약 엄마가 ‘엄마’로 검색해 내가 쓴 메모를 본다면? 그중엔 분명 엄마가 상처받을만한 내용도 존재한다.”(164쪽)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죽은 이는 말이 없고 권리도 없다. 자신의 원고를 태우라는 프란츠 카프카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고 대신 책으로 출간됐다. 이런 이들은 한둘이 아니다. 앞으론 온라인상 정보도 이렇게 떠난 당사자 동의 없이 유포될 수 있다. 모두가 살아있을 때 “나의 비밀을 지켜달라”며 믿을 만한 대리인을 세우고 공증이라도 받아야 하는 걸까.

국내에선 아직 논의가 적극적이지 않은 연명의료결정법이나 존엄사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기회도 던진다. 죽음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도 결국 더 나은 삶을 위한 이야기다. 

[관련기사 : 우리가 죽으면 그 뒤는 누가 처리할까]
[관련기사 : 외롭지 않을 권리를 생활동반자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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