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이 시대가 바라보는 정의란 무엇일까요? 바로 능력에 따른 경쟁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그것을 위한 절차상 공정만 보장되면 차별도 용인될 수 있는 것이 정의일 것입니다. 요즘 많은 이들이 이에 발맞춰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경쟁하고 승리한 자에게는 모든 것을 밀어주는 대신, 패배한 자에게는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입을 모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런 관점이 특히나 청년세대의 관점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과 관점을 달리하는 청년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트랜스젠더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능력과 절차적으로 공정한 경쟁이라는 조건이 갖춰져도 트랜스젠더라면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생존조차 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이면을 일상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는 수능이 마치 대단히 공정하고 안전한 시험인 것처럼 말합니다.

저는 수능을 망쳤습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수능을 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정말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능 시험장은 성별에 따라 장소가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나 봅니다. 시험을 앞두고 복도를 지나갈 때, 여러 남자 무리들이 저 계집년이 왜 왔냐면서, 쟤는 왜 도대체 남자시험장에 왔냐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한번 화장실 가서 벗겨봐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저는 들어야 했습니다. 수능시험을 망쳤을 때 그 순간의 처참함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2018년 제2회 부산 퀴어문화축제 풍경. 사진=민중의소리
▲2018년 제2회 부산 퀴어문화축제 풍경. 사진=민중의소리

 

트랜스젠더에게 일상인 차별

이런 무지막지한 폭력은 트랜스젠더에게 있어 예외적인 상황이 아닌 일상에 불과합니다. 성별 구분과 그로 인한 차별과 폭력은 시험장뿐만 아닌 학교, 투표소, 일터, 공공기관, 가정 등 생활공간 곳곳에 존재합니다. 이로 인해 트랜스젠더들은 삶의 많은 부분을 유예하거나 포기하곤 합니다.

사회경제적인 어려움도 적지 않습니다. OECD 국가 대부분은 극심한 성별 위화감 해결과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성전환수술과 호르몬 치료에 의료보험을 적용하나 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사회초년생 시절부터 혐오폭력과 더불어 장시간, 저임금, 불안정, 고위험군의 노동과 빈곤에 시달려야 합니다. 트랜스젠더라서 경쟁에서 탈락하는, 아니 경쟁은커녕 삶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는 것조차 한평생 바쳐야 가능한 상황입니다. 처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모순을 불공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전환 수술을 한 뒤 강제 전역한 변희수 전 하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의당 대표실 앞에 변 전 하사의 추모공간이 마련돼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성전환 수술을 한 뒤 강제 전역한 변희수 전 하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의당 대표실 앞에 변 전 하사의 추모공간이 마련돼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저는 수능 이후 수없는 번민과 환멸을 안고 수시 시험을 준비하여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이 사실만 듣고 제게 언젠가 트랜스젠더라서 언제나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첫 학기 등록금을 냈던 날, 한 트랜스여성이 숙명여대에 합격했음에도 학교 내외에서 벌어진 폭력으로 인해 입학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접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16살 때부터 연을 가졌던 훌륭한 군인 고 변희수 하사가 부당하게 군에서 강제전역 당하고 끝내 최근 우리 곁을 떠나간 장면을 접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마다 밥을 먹기도, 잠을 자기도 어려웠고 공부를 하기도 괴롭고 부끄럽고 두려웠습니다.

한계까지 밀어붙여서 성과를 만들어도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 아무 때나 무너지는 상황이 들려오는 상황에서 제 성과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아등바등해도 결국 무너지는 것이 아닐지에 대해 늘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살아남은 자로서의 부끄러움도 한몫했습니다. 도대체 무한경쟁과 능력주의, 허울뿐인 공정성 담론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노력한 자, 성과를 얻은 자를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노의 이어 말하기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서울시청을 둘러싸고 1인 시위를 이어나갔다. 사진=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사진=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능력주의 공정성, 불평등이 가져올 두려움 은폐위한 것

트랜스젠더가 느끼는 이런 두려움은 다른 한편 모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에 대한 폭력이 용납되면 다른 누군가, 결국 우리 스스로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트랜스젠더가 그렇듯이 많은 이들, 특히 청년들은 경쟁에서 탈락하는 것, 그래서 삶이 몰락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능력주의적 경쟁과 이를 위한 공정성은 실질적인 두려움을 은폐하기 위한 담론에 불과합니다. 불평등이 야기하는 삶의 불안을 은폐하며 경쟁으로 내몰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는 이 시대의 핵심적인 문제가 불평등이라고 선언할 때입니다.

우리 시대의 핵심적인 문제가 차별과 불평등이라는 것을 자본과 보수양당은 결코 모르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차별과 불평등을 기반으로 우리를 분열하고 경쟁에 몰아넣어 이득을 보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국민 대다수가 찬성하는 차별금지법을 몇 년째 혐오세력을 핑계로 무시하고 오히려 그들의 논리에 편승하던 장면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이러한 작태는 자본과 보수양당이 여타 사회 문제에 있어서도 늘 유보적이고, 혹은 후퇴적인 모습을 보여줬다는 사실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들의 정치에 환멸을 느끼는 것을 넘어 새로운 정치와 대안사회를 함께 열어나갑시다. 그들이 허울뿐인 공정과 배제, 경쟁을 동력원으로 삼았다면 우리는 평등과 연대의 언어로 그들을 넘어섭시다. 저도 그 새로운 정치의 시작을 스스로 열어나갈 것을 다짐하며, 차별금지법을 비롯해 소수자의 권리가 온당하게 보장 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제가 있는 자리에서 노력하겠습니다. 나아가 모든 이가 도구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하기를 기대합니다.

<연재 순서>
① 우리는 왜 세대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하는가-김건수 (청년학생 시국선언 집행위원)
② 청년비정규직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시장의 불공정, 불평등-김태훈(한국지엠비정규직 청년노동자)
③ 능력주의는 장애인차별에 왜 무력한가-유진우 (노들장애인자립센터 청년장애인)
④ 학력주의에 기반 한 공정담론이 청년의 이해를 대변 못하는 이유-김정래 (투명가방끈)
⑤ 공정담론은 여성의 안전한 삶과 평등한 일자리에 대안이 되지 못 하는가-안지완 (인천대 페미니즘 학생모임 젠장)
⑥ 공정이 아니라 불평등에 대한 싸움을 벌여야 할 때-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⑦ 정상성을 기준으로 한 능력주의는 차별을 막기 어렵다-한빛 (청소년트랜스젠더인권모임 튤립연대)
⑧ 시대의 위기를 바꾸기 위해 정치를 바꿔야-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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