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낸 출판사를 상대로 판매·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이 제기됐다. 지난달 법원이 이미 “신청 이유가 없다”고 기각한 주장이 신청인만 달리해 다시 접수됐다.

한국 내 납북자 가족 20여명은 지난달 14일 서울서부지법 민사21부에 출판사 민족사랑방이 발간한 ‘세기와 더불어’의 판매·배포를 금지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접수했다. 지난 4월23일 NPK아카데미, 법치와자유민주주의연대 등 보수 성향 단체들이 낸 가처분 신청에 이어 두 번째다.

이번 신청은 지난달 13일 NPK아카데미 등의 첫 번째 가처분 신청이 기각된 바로 다음 날 제기됐다. 첫 번째 사건은 신청인들이 기각 직후 항고해 서울고등법원이 심리 중이다. 두 사건의 법률 대리인은 NPK아카데미 대표자이기도 한 도태우 변호사 및 문수정·이명규 변호사로 동일하다.

신청인들 주장도 대동소이하다.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죄) 위반이 핵심 내용이다. ‘국가 존립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 등의 활동을 찬양·고무하거나 동조’하는 범죄다.

신청인 측은 “김일성 주석은 UN이 인정한 반인도범죄자이고 해당 서적은 김일성 일가를 미화한 책으로, 국가보안법 7조 5항에 따라 판매·소지·배포할 경우 형사 처벌 대상이 되는 이적표현물로 법원이 인정했다”며 출판사가 “이 책을 일반에 판매·배포해 대한민국 헌법 10조가 규정하는 인간 존엄성 및 인격권을 침해하고 헌법 3·4조가 규정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해한다”고 주장했다.

▲'세기와 더불어' 표지. 사진=출판사 민족사랑방
▲'세기와 더불어' 표지. 사진=출판사 민족사랑방

그러나 서울서부지법 민사21부는 지난 13일 “신청인 주장과 제출한 자료만으로는 신청을 구할 피보전 권리나 필요성이 소명됐다고 볼 수 없다”며 기각했다. 재판부는 “판매·배포로 신청인들 명예가 훼손되는 등 인격권이 침해되면 그 금지를 구할 수 있지만 책 내용은 신청인들을 직접적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며 “책이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는 점만으로 판매·배포가 신청인들 인격권을 침해해 사전에 금지돼야 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특히 “신청인들은 일반 국민 인격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이유로 판매·배포 금지를 구하는데, 인격권은 전속적 권리로 채권자들이 임의로 국민을 대신해 이 같은 신청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이번엔 납북자 가족이 신청인으로 나선 것. 도태우 변호사는 4일 통화에서 “신청인이 다르면 같은 주장의 사건이라 해도 접수할 수 있다”며 “(지난 13일) 기각 판결은 신청인에 판매·배포 금지를 구할 청구권이 없다고 봤다. 납북자 가족은 아주 직접적·개인적·구체적 피해를 주장하는 피해자다. 두 사건 신청 법리도 다른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 논란에 출판계는 학문·사상 자유를 가로막는 국가보안법 존치를 비판한 바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윤철호 회장)은 지난달 14일 “북한 책이라고 무조건 비판을 쏟아 붓고 ‘판금’ 조치를 내리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이제는 학술과 남북교류의 목적을 위해 북한 관련 책들이 학계와 시민사회에 자유롭게 개방돼야 할 때”라며 “법원의 기각 결정은 우리 국민 모두를 더 자유롭고 개방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리 문화는 물론 산업 생산 역량까지 더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성명을 냈다.

한편 출판시장에 배포되거나 출판사가 보유했던 세기와 더불어 서적은 전량 경찰에 수거된 상태다. 서울경찰청 및 국가정보원 수사관 등은 지난달 26일 민족사랑방 사무실 및 김승균 대표 자택을 수색해 이들이 소지한 책과 관련 장부 등을 압수했다. 경찰은 책을 배포키로 한 한국출판협동조합과 조합으로부터 책을 구매한 서점까지 압수수색했다. 이적표현물 제작·반포·판매 등을 금지한 국가보안법 7조 위반이 혐의다.

민주노총, 양심수후원회, 615남측위원회, 한국YMCA 등의 시민단체와 종교계 원로 196명은 지난 1일 기자회견을 열고 “사상 검열과 마녀사냥의 근거가 되는 반민주·반인권 악법을 폐기해 사상·표현·언론·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적극 보장해야 한다”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기 위한 공안 당국의 시대착오적 행위를 규탄하며 각 당 대표·국정원장 등과의 면담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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