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문화예술노동연대는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2021년 문화예술노동자 요구안 발표’를 통해 문화예술노동자 전체 요구 및 각 문화예술 현장의 요구를 드러냈습니다. 그 중 영화, 음악, 방송작가, 게임, 웹툰, 공연, 예술강사 들의 노동 현실과 구체적 요구를 연속기고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편집자 주

2017년 2월 순제작비 20억의 영화가 크랭크인했다. 영화현장에 표준근로계약서 사용이 보편화되고 있던 시기였다. 제작사는 예산이 적은 영화임을 강조하며 스태프들과 계약을 진행했다. 표준근로계약을 진행하고자 했던 스태프들은 제작사로부터 저예산영화여서 불가함을 통보 받았다. 4대 보험 등에 가입하는 것이 예산 사정상 어렵다는 것이었다. 예산이 적으니 근로계약이 아닌 용역계약을 작성하자는 제작사의 사정에 당장의 벌이가 없는 스태프들은 결국 도장을 찍고 촬영을 시작했다.

그렇게 촬영을 시작하고 지방에서 한창 촬영 중이던 4월 스태프들은 촬영 일정을 취소하고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는 통보를 받는다.

참여했던 대부분의 스태프들은 상황이 촬영 중단에 이를 정도로 심각함을 인지하지 못했다. 촬영 재개를 위해 노력한다는 제작사 대표의 사정은 스태프들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촬영재개를 두고 투자사와 제작사간의 주판알 튕기기가 계속되다 한 달여가 지났다. 대기하던 40여명의 스태프들은 결국 영문도 모른 채 일자리를 잃었다.

▲사진=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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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된 계약서는 스태프가 촬영 시작 전 전체 임금의 50%를 받고 종료 뒤 나머지 50%를 받도록 했다. 촬영이 중단될 경우 잔금 지급 여부를 언급하지 않았기에 스태프들은 별도로 계약 해제와 받아야 할 임금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했으나, 무색하게도 지급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다. 투자사가 올리려는 수익과 제작사가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 사이 어디에도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40여명과 그들에게 지급해야 할 1억여 원 임금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가재는 게 편’이란 생각에 스태프의 화살은 제작사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향한다. 그 역시 스태프와 같은 처지임에도 보이지 않는 사정이 된다. 책임지는 사람이 책임지려 하지 않으니 엉뚱한 사람에게 불똥이 튀었다.

노동자가 아닌 사업자


급여 기일이 지나도 지급이 이뤄지지 않자 스태프들은 2017년 6월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제기했다. 노동자가 임금을 체불했으니 노동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담당 직원에겐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담당 직원은 ‘용역계약서’를 작성했으니 노동부에서 다룰 사안이 아니라며 진정을 넣은 스태프들에게 취하를 종용했다고 한다. 계약서의 ‘형식’이 아니라 일하는 ‘실질’을 봐야한다던 법원의 판단은 현장에 닿지 않았다. 노동부의 ‘실질’ 확인을 위한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예산 영화의 사정을 고려한 ‘용역계약서’는 ‘임금’이란 말 대신 ‘보수’로 명시했고 월지급이 아닌 ‘계약금’, ‘잔금’이라 했으며, 근로소득세 아닌 3.3%의 용역사업 소득세를 공제하도록 했고 산재보험이 아닌 사망시 1억 원을 지급하도록 하는 상해보험에 가입하도록 했다. 또한 ‘을’의 용역제공 장소(촬영장소)는 ‘갑’과 ‘을’이 합의하여 정하도록 해 스스로 알아서 하는 일처럼 여겨지게 만들었다. 촬영 장소는 제작사가 정하고, 장소 고지에 따라 스태프들의 출근이 이루어지고 퇴근 역시 그 날의 촬영 종료가 확인돼야 할 수 있었다. 계약한 이상 촬영현장은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안 나오고 싶으면 안 나올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사진=문화예술노동연대
▲사진=문화예술노동연대

프리랜서라는 말이 계약된 스태프의 ‘프리’한 출퇴근을 언급하는 것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다. 제작사 역시 스태프들이 계약 기간 중 ‘프리’하지 않도록 ‘을’의 용역제공은 ‘갑’에게 독점적으로 제공되도록 했고 ‘을’은 상급자 또는 ‘갑’이 위임한 직책상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렇게 영화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갑’에 의해 스태프들은 사업자가 되었고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당했다.

노동자의 증명


노동부가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고 하니 법으로 따져봐야 했다. 스태프들은 제작사 대표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근로감독관이 조사를 진행했고 영화 제작현장에서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기소된 첫 번째 사건이 됐다. 재판이 시작하자 스태프들에게 저예산 영화의 사정을 전달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용역계약서는 제작사가 취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가 됐다.

제작사는 ‘사용자의 지위에 있지 아니하고, 피해자들은 근로자가 아니므로 피고인은 근로기준법 위반의 죄책을 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재판이 시작하고 7개월 뒤 나온 1심 판결은 제작사에 고용된 근로자로 판단하여 근로기준법이 적용된다고 확인했다. 근로기준법 위반에 대해 제작사에 벌금형을 선고했다.

제작사는 바로 항소했다. 이유로는 “△영화 제작 과정에서 용역을 제공한 사람들과 계약을 체결한 실질적 당사자는 각 부서장들인 점 △피고인은 각 부서장들과 사이에 도급계약을 체결하고, 제작비용을 지급하기 위해 관행에 따라 형식적으로 스태프들과 사이에 계약서를 작성하였을 뿐인 점 △기타 스태프들의 채용 과정, 계약 내용, 근무 형태, 대금 지급 과정 등에 비추어 보면, 스태프들은 피고인과 관계에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지 아니”한다고 주장했다.

▲사진=Gettyimagesbank
▲사진=Gettyimagesbank

2심 법원은 1심 선고에 더한 판결문을 내놨다. “피고인은 영화의 제작 방향을 설정하고 각 부서의 제작과정을 총괄하는 권한을 보유하였고, △영화 제작에 필요한 개별 분야에 관하여 전문적 지식과 네트워크를 보유한 각 부서 책임자를 통해 각 부서에 소속된 스태프들의 업무를 통제 할 수 있었던 점 △피고인이 설정한 예산 및 계약기간 내에서 스태프들과 사이에 개별계약이 이루어졌고 스태프들이 어떠한 손실 위험을 부담하지 않았던 점 △계약내용에 의하면 피고인은 스태프의 고용 및 해고에 관한 권한을 보유하고, 스태프들은 구체적 업무 분담과 수행에 관하여 그 상급자 또는 피고인이 위임한 직책상 상급자의 지시에 따르도록 규정되어 있는 점 △최근 영화 제작자들과 근로자들 사이에는 표준계약서 등을 활용하여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전제로 고용계약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바” 피해 스태프들의 사정이 다른 영화현장과 다르다고 보기 어렵다며 1심의 판결이 정당하다고 인정했다.

제작사는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역시 기각됐고 근로기준법 위반의 죄에 대해 형이 확정됐다. 임금체불의 피해를 당하고 3년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

당연하게도 우린 노동자다


재판에 참여했던 당사자 스태프는 일하다 받지 못한 돈을 받고 책임자에 대한 벌을 구하는 과정을 거치며 어처구니가 없다고 토로했다. 당연한 권리를 이야기했는데도 당연하지 않다고 했다. 처음에 사정을 하던 제작사가 임금체불의 책임자로 규정되니 사용자가 아니라고 발뺌하니, 돈을 떠나 화가 난다고 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다’고 하는 이들 때문에 벌어진 지난한 과정에 말한다. “왜 이런 일로 재판까지 가야하는 지 모르겠다.”

근로기준법이 정의하는 근로자의 간단한 정의는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이다. 근로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으로 정의한다. 길지 않은 정의를 확인하는데 3년의 시간이 걸렸다. 노동자를 위한 권리를 명시하고 있으나 권리를 보장 받는 노동자는 제한적이다. 고용돼 있어도 상호대등한 관계의 계약으로 변용되고 ‘갑’은 상호 합의, 혹은 다른 ‘갑’을 등장시켜 책임 없음을 주장한다. 영화 현장에 근로기준법이 적용되고 있음에도 예산에 따라, 업무 특성에 따라 제외시키려는 성향이 여전히 존재한다.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이 8일 ‘또 다른 김용균, 문화예술노동자 산재실태 현장발표회’에서 영화산업 산재 실태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이 8일 ‘또 다른 김용균, 문화예술노동자 산재실태 현장발표회’에서 영화산업 산재 실태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최근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극장의 관객이 급감했으나 넷플릭스나 종편 및 공중파 등의 드라마 현장은 상대적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나 카메라며 조명이며 사용 장비도 다르지 않기에 영화 스태프가 드라마 현장에 참여하는 비중이 늘었다. 영화 현장 변화의 여파와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 등 노동조합의 역할로 방송 드라마 현장도 예전보다 많이 개선됐지만,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적용되는 현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방송 현장도 마찬가지로 용역계약 형식을 사용하고 제작사는 책임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드라마 현장의 계약서는 심지어 스태프가 ‘근로자’임을 주장할 수 없도록 명기하기도 한다. 어떤 것은 일하다 다치거나 사고가 발생하면 회사의 책임이 아닌 부서장의 책임으로 규정해놓고 있다. 법은 개선돼도 법 밖으로 나가려는 모습이 참으로 치열하다. 방송 드라마 현장은 근로감독을 통해 스태프들의 노동자성이 확인 됐는데도 근로계약을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 및 방송 현장에서 사용자가 스태프들이 ‘노동자가 아니게’ 하기 위해선 별다른 노력은 필요하지 않았다. 노동자가 스스로 사업자가 아님을 증명하고 노동자임을 입증해야 한다.

노동부는 여전히 계약서만 보고 영화스태프가 노동자인지 여부가 사정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매일 같은 곳으로 정시 출퇴근하는 이들만이 노동자가 아니라 고용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교묘해짐에 따라 일하는 실질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프리랜서의 권리를 논하기 앞서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확인해야 한다. 모든 영상 콘텐츠제작 현장의 근로기준법 적용이 당연해져야 한다.

소개된 재판에 참여했던 스태프의 말이다. “우리도 노동자다. 단지 어디 한 군데 소속되어서 몇 십 년 일하지 않을 뿐, 제작사가 정한 장소에서 시키는 일을 하고, 제작사에서 주는 임금을 받고 일한다. 그런데 우리 보고 노동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린 뭔가?”(민중의 소리 스태프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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