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상속세 12조원 납부 및 사회환원 계획을 발표하자 몇몇 언론이 ‘상속의 새역사를 쓰다’ ‘거인다운 면모’라 극찬하면서 ‘국민여론이 사면으로 기운다’고 호도하는 주장을 쏟아냈다. 언론이 차분하게 따지기는커녕 되레 흥분하고 비이성적 기사로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범죄자인 재벌총수 구하기에 나선 모양새다.

이에 시민사회단체는 사회환원 계획이 이미 13년 전 삼성특검 수사때 밝혀진 차명재산의 사회환원 약속을 이제와서 통큰 결단으로 포장하는 행위라며 이건희 상속세 납부와 이재용 사면 연계 논의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삼성은 28일 고 이건희 회장의 상속세로 약 12조원을 낼 예정이며, 이 회장 개인 소장 미술품 2만여점을 기증하고 감염병 대응 및 소아암 환자 치료 등에 1조 원을 기부한다는 등의 상속세 납부 계획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매체들은 이 소식을 앞다퉈 전했다. 특히 석간 문화일보는 28일자 사설 ‘‘반도체 세계 1위 잃을 수 있다’는 재계의 일치된 우려’에서 삼성의 이날 상속세 납부와 사회환원 계획을 두고 “유산의 60%가 사회에 환원된다고 한다”며 “세계 초일류 기업을 일군 거인다운 면모”라고 극찬했다.

문화일보는 그러면서 경영권 승계를 위한 뇌물죄 등으로 형이 확정돼 복역중인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론과 상속세 문제를 교묘하게 이어 붙였다. 문화일보는 “그런데 고(故) 이 회장의 최대 업적이기도 하고, 국가 차원에서도 중차대한 반도체 산업이 중대 기로에 처했다”며 “문재인 대통령은 헌법이 부여한 특별사면 권한의 취지를 심사숙고하고, 사면 문제를 결단하기 바란다. 대통령 취임 선서에는 ‘국민의 복리 증진’도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다. 일반인이 범죄를 저지르면 칼같이 징역형 만기를 채우는데 재벌총수에는 헌법의 ‘국민복리증진’까지 갖다 붙이며 특별히 사면하라는 해괴한 논리다.

헤럴드경제는 같은 날짜 5면 머리기사 ‘최고수준 프라이빗 컬렉션 기증…예술품 상속 새 역사 쓰다’에서 “삼성가의 기증을 놓고 미술·문화계에서는 찬사가 이어진다”며 “그도 그럴 것이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 ‘특급이 있으면 컬렉션 전체의 위상이 올라간다’는 명품주의가 반영된 이건희 컬렉션은 전세계 컬렉터라면 누구나 탐 낼 만한 소장품이었다”고 미화했다. 이 신문은 “상속세 재원 마련을 위해 해외 경매에 부쳐질 수 있다는 추측이 나왔을 때, ‘세기의 경매’였던 록펠러 3세 경매(2018년·낙찰총액 9210억원)을 가뿐히 뛰어 넘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며 “이 소장품들이 국가기관에 기증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결정’”이라고 썼다. 거의 글쓴이가 흥분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표현이다.

▲서울 서초구 삼성 사옥에 날리는 삼성 사기. 지난해 12월 22일 촬영. ⓒ연합뉴스
▲서울 서초구 삼성 사옥에 날리는 삼성 사기. 지난해 12월 22일 촬영. ⓒ연합뉴스

 

아예 국민여론이 사면론으로 기울어가고 있다고 임의로 판단하는 기사도 있었다. 아이뉴스24는 이날 오후 기사 ‘[삼성家 상속] 역대급 사회환원 계획 공개…이재용 ‘사면론’ 힘 싣나’에서 “삼성 일가가 고(故) 이건희 회장의 유산에 대한 상속 내용을 공개하며 14조~15조원대의 대규모 사회환원 계획을 공개하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사면론’에 불이 붙는 모양새”라며 “정부는 곳곳에서 제기된 이 부회장 사면 요구에 대해 수용하지 않으려는 모습이지만, 국민 여론은 점차 ‘사면’으로 기우는 모양새”라고 추측했다.

이 매체는 재계 관계자가 “삼성 일가가 상속세 납부를 위해 정공법을 택함으로써 이 부회장의 사면 여론에 더 긍정적인 영향이 미칠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에 수조원대 사회환원 계획이 공개되면서 이 부회장 사면에 대한 국민 여론은 더 빠르게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고 썼다.

YTN는 이날 오후에 방송한 ‘[인터뷰투데이] 삼성家 상속세 12조 원...이건희 지분 상속 비율 미정’이라는 코너에서 경제전문가를 초청해 대담을 나누면서 박광렬 앵커가 “이런 가운데 재계에서는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론도 조심스럽게 확산되고 있는데 오늘 삼성가 발표 이후에 청와대와 정치권의 분위기가 바뀔지도 큰 관심”이라고 주장했다.

경실련 “상속세 납부 당연, 기증 미술품 무슨 돈으로 샀는지부터 밝혀야”

시민사회에서는 이 같은 보도행태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내놓았다.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28일 성명에서 “이재용 부회장 일가 상속세 납부는 당연한 것”이라며 “이재용 부회장 사면여론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경실련은 특히 사회공헌 1조원 발표 주장에 “사회공헌의 경우, 2008년 고 이건희 회장의 차명재산 사회헌납 약속을 따르면 6조 원 정도의 기부가 필요함에도 1/6 수준의 사회공헌을 발표하면서도 통 큰 결단을 한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실련은 “상속세 납부와 사회공헌을 과도하게 이미지 마케팅해 사면여론 조성에 활용되는 것은 경계되어야 한다”며 삼성가가 1대 고 이병철→2대 고 이건희→3대 이재용 부회장에 이어지는 세습과정에서 불법 및 편법 경영권 승계로 실망을 줬을 뿐 아니라 대물림 과정에서 조세포탈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비판했다. 현재 이 부회장까지 내려오면서 형성된 삼성가의 재산은 비정상적이고 불법적인 부분이 있다고도 했다. 경실련은 “당연한 상속세 납부와 부족한 사회공헌임에도, 이를 과도하게 포장하여 이재용의 사면 여론을 조장하려는 속셈”이라고 했다.

경실련은 특히 주식과 부동산 등 상속 대상 재산에 대한 구체적 배분 금액과 고 이건희 회장의 미술품 기증 목록을 구체적으로 발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경실련은 기증하겠다는 미술품을 어떤 경위로 구입했는지 그 재원부터 명확히 밝히라고 촉구했다.

노동시민사회 “13년전 삼성특검 때 발견된 차명계좌 4조5000억 사회환원 어떻게 됐나”

경실련을 포함해 경제개혁연대•경제민주주의21•금융정의연대•민변 민생경제위원회•민주노총•참여연대•한국노총•한국YMCA전국연맹도 이날 공동으로 내놓은 성명에서 “국정농단 범죄에 대한 사면 논의는 사회정의 원칙 무너뜨리는 것”이라며 “상속세 납부 및 기부 계획, 재판 과정에 부당한 영향력 미쳐선 안된다”고 발표했다.

경제5단체, 조계종 성균관 등 종교계의 이재용 사면 건의와 언론의 사면 요구를 들어 이들은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사면논의는 우리 사법제도와 경제범죄에 대한 원칙을 뒤흔들 수 있는만큼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월18일 오후 서울고법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출석을 위해 법정에 들어서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이날 징역 2년6월이 확정돼 법정구속됐다.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월18일 오후 서울고법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출석을 위해 법정에 들어서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이날 징역 2년6월이 확정돼 법정구속됐다. ⓒ연합뉴스

 

이들은 “개인의 사익을 위해 삼성그룹과 국민연금에 막대한 손해를 입히고 정권 실세에게 불법로비를 일삼았던 중범죄자에게 사면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어불성설”이라며 “이 부회장의 일신과 삼성의 회사경영은 무관하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오히려 회사돈을 횡령해 뇌물을 공여한 불법행위로 유죄판결이 확정된 이 부회장에 사면을 실시한다면 사회 정의와 법치주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강조했다.

상속세 납부와 사회환원 계획 발표를 두고 이들 노동시민사회단체는 “상속세 납부와 기부 계획 또한 사면논의나 삼성물산 불법합병 재판과는 별개”라고 밝혔다. 이들은 “이미 2008년 조준웅 특검으로 드러난 4조 5000억원 규모의 차명계좌에 대한 사회환원을 약속한 바 있다”며 “그동안 삼성이 저지른 불법의 결과물에 대한 사회환원 조치가 기부행위로 포장되어 사면 논의나 이후 재판 과정에 부당한 영향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재계와 종교계, 일부 정치권이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사면 제안을 당장 중단하라”며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태의 죗값을 제대로 치러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 27일 오후 브리핑에서 “이재용 삼성 부회장 사면 건의 관련해서는 현재까지는 검토한 바 없으며, 현재로서는 검토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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