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아내가 지난해 KBS와 기자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1·2심에서 승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재판은 지난해 12월 확정됐다. KBS와 기자가 김 전 차관 아내 송아무개씨에게 15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다. KBS가 허위사실을 적시해 송씨 명예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 판결은 왜곡·과장 논란에 휩싸인 ‘윤중천·박관천 면담보고서’와 함께 재차 거론되고 있다. 대검찰청 과거사 진상조사단 조사8팀 소속이었던 이규원 검사가 면담보고서를 어떻게 과장했고, 이 보고서 내용에 기초한 언론 보도가 사실을 얼마나 왜곡했는지 정황이 한국일보 등에 지난 19일부터 연속 보도되면서다.

문제가 된 보도는 KBS가 2019년 3월6일 보도했던 ‘최순실 배후설’ 리포트다. 박근혜 청와대가 별장 성접대 동영상 의혹에도 김학의 법무부 차관 인사를 강행한 배후에 최순실이 있었다는 의혹이다.

현재는 원고 일부가 수정됐지만 당초 KBS는 “대검 진상조사단은 그 배후에 최순실씨가 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김 전 차관의 부인(송씨)과 최순실씨가 모 대학교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만나 친분을 쌓은 사이라는 것”이라며 “박관천 전 경정은 최근 진상조사단에 ‘김 전 차관이 이 같은 친분으로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되고, 법무부 차관으로 임명됐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KBS 기자는 2018년 초부터 김학의 사건을 포함해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에서 다루는 사건을 전담했던 이아무개 기자다. 박관천 전 경정은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을 지냈다. 박 전 경정은 2013년 3월 초 김 전 차관 사건에 관한 내사를 진행했다. 이규원 검사 등은 2019년 2월12일 박 전 경정을 만난 뒤 ‘박관천 면담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만남 한 달여 후 KBS ‘최순실 배후설’ 리포트가 보도됐다. 

▲ KBS가 2019년 3월6일 보도했던 ‘최순실 배후설’ 리포트다. 박근혜 청와대가 별장 성접대 동영상 의혹에도 김학의 법무부 차관 인사를 강행한 배후에 최순실이 있었다는 의혹이다. 사진=KBS 뉴스
▲ KBS가 2019년 3월6일 보도했던 ‘최순실 배후설’ 리포트다. 박근혜 청와대가 별장 성접대 동영상 의혹에도 김학의 법무부 차관 인사를 강행한 배후에 최순실이 있었다는 의혹이다. 사진=KBS 뉴스

김학의 아내 송씨 “최순실 알지도 못해”

KBS 보도 후 김 전 차관 아내 송씨는 “나는 대학교 최고경영자 과정에 등록한 적 없다. 최순실을 알지도 못한다. 남편인 김학의의 법무부차관 임명에 영향력을 행사한 바 없다”며 “KBS와 기자는 허위사실을 적시함으로써 명예를 훼손했다”며 손배소를 제기했다. 송씨는 박관천 전 경정에 대해서도 “허위사실을 최초로 외부에 발설해 내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KBS와 이 기자, 박 전 경정이 연대해 위자료 5억원을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1심인 서울남부지법 제15민사부는 지난해 6월 KBS와 기자가 송씨에게 15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선고했다. 박 전 경정에 대한 송씨의 청구는 기각됐다.

1심 법원은 먼저 KBS 보도가 수정된 경위를 도마에 올렸다. 당초 KBS는 “송씨와 최순실이 모 대학교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친분을 쌓았다”고 보도했다가 한 시간여 후 ‘모 대학교 최고경영자 과정’이라는 문구가 삭제됐다. 재판부는 KBS 보도에서 ‘모 대학교 최고경영자 과정’이라는 문구가 삭제된 것과 관련해 “충분한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고 보도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KBS는 “취재원 보호를 위해 문구를 삭제했다”고 주장했다. 박 전 경정은 “(내가) 대검 진상조사단을 통해 KBS 보도에 대한 수정을 요구해 기사가 수정됐다”는 취지로 주장했고, 법원은 박 전 경정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고 봤다.

판결문에 따르면 박 전 경정은 보도 당일 KBS 기자와의 통화에서 “현직에 있을 때 있던 일이라 말해줄 수 없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재판부는 박 전 경정의 이 발언에 “이 사건 쟁점 부분(최순실 배후설)에 대한 구체적 답변을 회피하는 취지에 불과할 뿐 KBS 측 주장처럼 송씨와 최씨 사이의 친분을 사실상 긍정하는 의미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KBS 측은 여러 언론 보도와 KBS 보도(3월6일자) 이후의 법무부 검찰과거사위 발표와 수사권고, 과거사위원의 답변, 대검 진상조사단 최종보고서, 과거사위 보도자료 등을 언급하며 김학의 법무부 차관 임명에 관한 의혹이 자료에 담겨 있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를 테면 KBS 측은 2019년 5월29일 법무부 검찰과거사위 보도자료를 보도를 뒷받침하는 사례로 꼽았다. 하지만 재판부는 “그(보도자료) 기재 내용을 살펴봐도 ‘김학의 법무부 차관 임명 강행에 석연치 않은 의혹이 있다’는 취지일 뿐 이 사건 쟁점 부분(최순실 배후설)에 관련된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 검찰과거사위 보도자료에 ‘최순실’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 최서원(최순실)씨. ⓒ연합뉴스
▲ 최서원(최순실)씨. ⓒ연합뉴스

빈약한 취재원 보호 명분

KBS 측은 재판에서 자사 기자(이아무개 기자)가 보도 전에 취재원으로부터 “박관천에 대한 진상조사단 조사에서 최순실 배후설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는 점을 명확하게 들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하지만 ‘취재원 보호’를 이유로 취재원의 구체적 신원이나 세부 취재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에 “언론 자유를 위한 취재원 보호 필요성을 감안해도 이를 언론기관이 소명 자료를 제시할 일체의 부담을 면책하는 방편으로 활용할 수는 없다”며 “취재원 보호를 이유로 소명 자료를 제시하지 않아도 된다면, 익명 취재원을 활용한 과장·왜곡된 보도의 내용을 검증할 방안이 없고, 이에 따라 개인의 인격권 보호를 위한 언론 자유의 한계 설정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라고 밝힌 뒤 “KBS 등은 취재원으로부터 전문한 내용과 관련된 최소한의 소명 자료조차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재판부는 KBS 보도에 위법성 조각 사유도 인정하지 않았다. 보도 공익성은 인정되지만 KBS가 최순실 배후설 보도를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KBS 기자는 최순실 배후설 보도 전 송씨나 최순실씨에게 사실 확인을 위한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최씨는 보도 직후 변호인을 통해, 송씨는 KBS 기자에게 연락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KBS 기자가 미리 연락을 취했다면 송씨와 최씨가 답변을 회피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게 재판부 판단. 재판부는 “설령 송씨와 최씨가 (최순실 배후설에) 부인하는 취지의 답변을 할 것이 예상돼도 사실 확인을 위한 추가 취재를 하거나 (의혹을 부인하는 송·최씨의) 답변을 같이 보도 내용에 포함하는 것도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반론 취재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 것이다.

게으른 KBS 취재 지적한 재판부

재판부는 위법성 조각 사유를 따지며 KBS 취재 부실함을 판시했다. △송씨나 최씨가 국내 대학교 최고경영자 과정에 등록한 적 있는지 확인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보도 문구를 삭제했다는 점 △송·최 두 사람이 친분에 기초해 모임을 가진 적 있는지 등에 관해 확인하거나, 최씨가 김학의 법무부 차관 임명 관련 구체적으로 누구를 통해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조사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 등이다.

재판부는 “설령 시중에 ‘김학의가 법무부 차관에 임명된 배경에 송씨와 최씨 간 친분이 영향을 미쳤다’는 취지의 풍문이 존재하고 다른 방송사에서 그와 유사한 내용으로 보도한 적 있더라도 그런 사정만으로 KBS가 충분한 사실 확인 없이 보도에 이른 잘못이 면책되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언론기관이 공적 인물 가족과 관련된 사항에 대한 보도를 하는 경우 설령 보도 내용이 공적 관심 사안에 관련한 것이라도 특히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며 “사인에 불과한 가족은 공적 관심 사안에 권력과 영향력을 미친다고 보기 어려움에도 보도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질 경우 받는 피해와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할 책임을 지울 근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판시했다.

1심 법원의 1500만원 배상 판결에 송씨와 KBS 모두 항소했다. 2심인 서울고법 제8민사부는 양측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2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인용하면서도 몇 가지 사안에 추가 판단을 내렸다. 

KBS 측은 주된 보도 내용은 “송씨와 최씨 간 친분 관계와 최씨를 통한 법무부차관 임명 청탁에 관해 박관천이 진상조사단에서 진술했다는 사실”이라고 주장했지만, 2심 재판부는 “이 사건 주된 보도 내용은 ‘박관천의 진술 내용’, 즉 ‘송씨와 최씨 사이에 친분이 있고, 이런 친분으로 송씨의 남편이 법무부 차관에 임명됐다’는 내용”이라며 KBS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심 재판부는 “KBS는 기자가 진상조사단원으로부터 박관천 진술을 확보했다고 주장하나 이 법원에 제출된 KBS 기자(이아무개 기자)의 취재 정리파일은 기자가 임의로 작성한 것이고 파일 내용만으로는 그 내용 진위 여부나 취재원 신원 등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 등을 종합해 보면, KBS 측이 주장하는 사정만으로 이 사건 보도 내용을 진실이라고 믿은 데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KBS 기자 취재원이 ‘대검 진상조사단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 2019년 3월18일자 JTBC 뉴스룸 보도.
▲ 2019년 3월18일자 JTBC 뉴스룸 보도.

진상조사단 단독보도, 소송서 패소

‘윤중천·박관천 면담보고서’가 언론에 독으로 돌아오고 있다. JTBC는 지난 2월 윤갑근 전 고검장이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패소했다. 윤갑근 전 고검장이 건설 브로커 윤중천씨 별장에 출입했다는 의혹 등을 보도해서다.

JTBC는 2019년 3월18일 “최근 검찰 과거사 진상조사단 재조사에 소환된 윤(중천)씨가 윤 전 고검장과의 친분을 인정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별장 출입 여부에 구체적 대답을 피하면서도 윤 전 고검장과 골프를 쳤다는 등 친분을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법 제14민사부는 지난 2월 “JTBC 보도는 공직자였던 윤갑근에 대한 감시·비판·견제라는 정당한 언론 활동 범위를 벗어나 악의적이거나 심히 경솔한 공격으로서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며 JTBC 기자, 손 앵커, JTBC 등 피고들이 윤 전 고검장에게 70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앞서 검찰은 JTBC 기자와 KBS 기자, 이규원 검사에 주목한 바 있다. 동아일보는 지난달 9일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는 최근 JTBC의 A 기자와 KBS의 B 기자를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각각 조사했다”며 “검찰은 JTBC 기자가 당시 이 검사로부터 ‘윤중천 면담보고서’ 실물을 전달받은 단서를 확보했다. 이 검사 등의 휴대전화 통신기록과 관련자 진술을 종합해 이 같은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다음날 보도에선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는 최근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한 JTBC의 A 기자로부터 2019년 3월18일 ‘건설업자 윤중천씨가 윤갑근 전 고검장과의 친분을 인정했다’는 보도의 근거가 된 면담보고서를 제출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A 기자로부터 이 면담보고서 출처가 이 검사라는 진술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미디어오늘은 JTBC 기자 입장을 듣고자 했으나 현재 수사 중인 까닭에 그에게 답변을 들을 수는 없었다. 김 전 차관 아내에게 패소한 KBS 기자도 “드릴 말씀이 없다”고 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