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경기장에 높은 울타리가 쳐 있습니다. 아래 그림을 보세요. 키가 크거나 작거나 하나씩 상자를 딛고 올라선다면 여전히 키가 작은 사람은 경기를 볼 수 없을 겁니다.

이런 상황은 평등하지만 공평하다고 할 수 없겠죠. 우리는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고 말하곤 하지만 실제로 어떤 종류의 기계적인 평등은 실질적인 불평등을 만듭니다.

하지만 다음 그림처럼 키 큰 사람이 상자를 하나 양보해서 키가 작은 사람에게 더 많은 상자를 준다면, 그래서 세 사람 모두 경기를 함께 즐길 수 있다면 좀 더 공평한 결과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평등하지만 공평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그리고 보는 방식에 따라 이해관계가 달라지게 됩니다.

한 대학 교수가 장난 삼아 만든 이 이미지는 수백 가지의 다른 버전으로 변형돼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런 걸 소셜 ‘밈(meme)’이라고 하죠.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소개한 ‘문화 유전자(cultural gene)’가 소셜 네트워크를 타고 유행처럼 확산되면서 진화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 평등(equality)과 공평(equity).
▲ 평등(equality)과 공평(equity).

첫 번째 그림이 평등(equality)이라면 두 번째 그림은 공평(equity)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같은 그림을 보고 동등한(equal) 것이 공정한(fair) 것은 아니라고 해석하기도 했고요. 정의(justice)롭지 않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공정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부당할 수도 있습니다. 왜 내 상자를 다른 사람에게 줘야 하지? 내가 가진 것이 많다는 이유로(키가 크다는 이유로) 내가 가진 것을 빼앗기거나 다른 사람이 받는 혜택을 나는 받지 못해도 괜찮은 걸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요.

아예 생각의 틀을 바꿔볼 수도 있습니다. 상자를 몇 개 쌓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왜 울타리가 필요한 거지? 울타리가 없다면 모두가 함께 경기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세 번째 그림을 누군가는 해방(liberty)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격차 없는 세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만약 이 곳이 유료 티켓을 끊어야 관람할 수 있는 경기장이라면 상자를 딛고 올라서거나 울타리를 허무는 것이 오히려 옳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공짜가 아니던 게 공짜가 되면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울타리를 허물지 못한다면 공평하게 상자를 늘리자는 의견이 있을 수도 있고요. 물론 그 상자 역시 공짜가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는 비용을 부담해야 합니다. 울타리를 조금 낮출 수도 있겠죠.

이 그림에서는 울타리로 표현됐지만 이런 갈등은 단순히 키 차이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출신 지역이나 출신 학교일 수도 있고 피부 색일 수도 있습니다. 빈부 격차일 수도 있고요. 남녀 성별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장애와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일 수도 있고요.

여전히 누군가는 능력에 따른 공정한 경쟁을 이야기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애초에 경쟁의 규칙이 공정하지 않다고 반박할 것입니다. 이 울타리는 단순히 축구 경기를 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넘어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느냐 여부의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애초에 출발선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 기회의 균등이라고 하지만 애초에 출발선이 다른 경우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게 됩니다.
▲ 기회의 균등이라고 하지만 애초에 출발선이 다른 경우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게 됩니다.

현실에서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졸업하지 않는 사람의 출발선이 다릅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과 지방에 있는 대학의 학생들이 맞닥뜨릴 현실을 누군가는 노력과 실력에 따른 정당한 차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부모에게 부동산을 물려받은 누군가는 훨씬 더 빨리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섭니다. 여전히 현실에서 누군가는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누군가는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훨씬 더 위험한 환경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또는 너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배제되거나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심리학 연구에 ‘최후 통첩(Ultimatum)’ 게임이라는 게 있습니다. 한 친구에게 1만 원을 주고 다른 친구와 나눠 가지라고 합니다. 만약 다른 친구가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안 받겠다고 하면 1만 원을 빼앗기게 되고요. 내가 9000원을 갖고 친구에게 1000원을 주겠다고 하면 친구가 싫다고 할 가능성이 크고 그럼 둘 다 한 푼도 못 받게 됩니다. 이 실험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이좋게 5000원씩 나눠 갖는 걸 선택했습니다.

친구 입장에서는 1000원만 받아도 이익이겠지만 옳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 나는 포기할 테니 너도 9000원을 못 받게 만들겠어, 이렇게 거절할 수도 있죠. 그래서 상대방이 거절할 경우를 고려해서 공정한 분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 최후 통첩 게임의 분포. 친구에게 1000원을 주고 내가 9000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친구가 거절할 경우 1만 원을 다 잃게 된다. 평균을 내보면 3500원까지는 동의하지만 그보다 적을 경우 거절하는 경우가 더 많다.
▲ 최후 통첩 게임의 분포. 친구에게 1000원을 주고 내가 9000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친구가 거절할 경우 1만 원을 다 잃게 된다. 평균을 내보면 3500원까지는 동의하지만 그보다 적을 경우 거절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최후 통첩’을 변형한 ‘독재자(dictator)’ 게임에서는 조금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게임의 규칙을 바꿔서 친구가 거절하건 말건 그냥 알아서 나눠 가지라고 한 것이죠. 그랬더니 평균 7000원을 선택하고 3000원을 친구에게 줬습니다.

1만 원을 다 가질 수도 있고 친구에게 1000원만 주고 9000원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경우에도 어느 정도 공정과 정의에 대한 양심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최후 통첩’ 게임과 ‘독재자’ 게임을 비교하면 양심보다 더 강력한 것이 사회적 압력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친구의 동의를 얻지 못할 경우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죠. 실제로 ‘최후 통첩’ 게임에서는 친구가 거절하는 기준이 평균 3500원이었습니다. 3400원만 돼도 차라리 안 받겠다고 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 4차 산업혁명 시대에 K자형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지만 누군가는 절망의 내리막길을 맞닥뜨리는 상황입니다.
▲ 4차 산업혁명 시대에 K자형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지만 누군가는 절망의 내리막길을 맞닥뜨리는 상황입니다.

우리에게는 공정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누구나 좀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지만 구호를 걷어내고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평등과 공정, 정의는 모두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실제로 뭔가를 실험하고 행동에 나설 수도 있습니다.

‘분배 정치의 시대’를 쓴 제임스 퍼거슨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교수는 “대량 생산과 만연한 빈곤의 세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생선도, 더 많은 어부도 아니다. 문제는 분배, 그리고 분배를 둘러싼 정치”라고 강조했습니다.

물고기를 한 마리 주면 하루만 배부르겠지만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면 평생을 배부르게 할 거라는 게 오래된 격언이지만, 기본적으로 생산 중심의 접근이었죠. 우리는 이제 물고기를 나눠줘야 하는 분배 정치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괜찮은 일자리는 계속 줄어듭니다. 격차가 너무 벌어지면 시스템이 흔들리고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게 됩니다.

우리는 상자를 몇 개 어떻게 나눠가질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상자와 울타리를 모두 걷어치우는 새로운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재벌 회장의 아들에게도 의무급식을 제공하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문을 닫은 상점 주인에게 국가가 보상을 하는 것입니다. 최저 생계 보장을 넘어서서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권리를 위한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미디어는 세상을 보는 창입니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우리를 고정 관념에 가두기도 하고 새로운 가능성과 상상력을 펼쳐 보이기도 하죠. 다르게 생각하는 힘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질문과 반론을 거쳐야 비로소 본질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디어 교육학자 패트리샤 오프더하이디(Patricia Aufderheide)의 정의에 따르면 미디어 리터러시는 “미디어에 접근하고, 미디어를 분석하고, 평가하고, 창조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미국 미디어리터러시교육협회(NAMLE)는 “미디어 리터러시는 사람들에게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미디어를 만들고, 효과적으로 의사 소통하고 적극적인 시민이 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고 설명합니다.

앞으로 주니어미디어오늘에서 계속 다루겠지만 미디어 리터러시는 다음의 다섯 가지 핵심 개념으로 시작합니다.

  1. 우리가 읽고 보고 듣는 미디어의 모든 메시지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2. 미디어의 모든 메시지는 창의적인 언어로 구성됩니다.
  3. 사람들은 같은 메시지를 서로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4. 미디어에는 가치와 관점이 개입돼 있습니다.
  5. 대부분의 미디어는 이익과 권력을 얻기 위해 조직됩니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질문을 만들어 볼 수 있습니다.

  • 누가 이것을 썼을까.
  • 어떤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하는가.
  • 우리가 이 메시지에 끌린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 다른 사람들은 이 메시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 내가 이해하는 것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 여기에는 어떤 삶의 방식과 가치관, 관점이 반영돼 있는가. 또는 반영돼 있지 않은가.
  • 왜 이런 메시지를 만들었을까.
  •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
  • 이걸 다르게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핵심은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의도를 묻고 검증하고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현상의 이면을 보고 뉴스의 행간을 읽어야 합니다. 드러난 것 못지않게 드러나지 않는 것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정관념과 편견에 맞서야 합니다. 그 어느 것도 믿지 말아야 하지만 논리와 근거를 갖춰 나만의 생각과 주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그래서 ‘다르게 생각하는 힘’이라고 새롭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미국 미디어리터러시센터는 “비판적 사고가 없는 교육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고 규정하기도 했지만 비판적 사고를 구성하는 것이 결국 다르게 생각하는 힘이니까요.

주니어미디어오늘 2호에서는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다양한 뉴스 읽기 방법론을 소개했습니다.

온 국민이 분노했던 뉴스가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사연과 맥락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결론이 실제로 현실과 겉도는 경우도 많고요. 온라인과 소셜로 소통의 공간이 옮겨오면서 새로운 갈등과 충돌이 나타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찾는 확증 편향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제한된 정보와 누적된 학습의 결과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합니다. 언론이 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애초에 진실이라는 것은 상대적이고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읽어야 합니다.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우리 사고의 폭과 깊이를 넓혀줄 좋은 읽을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주니어미디어오늘 2호와 함께 모험을 떠나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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