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지상파 연예대상에 잊을 만하면 상을 타는 ‘육아예능’ 프로그램은 그 인기만큼이나 불편한 지점이 많다. 육아가 보통 여성 몫인 현실에서 아버지가 아이를 돌본다는 것만으로 주목받는 현상도 그렇지만 더 큰 이유는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에 나오는 집들이 너무 크고 좋아서다.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하다 독서교실에서 어린이들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김소영 작가는 책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이 점을 꼬집었다. ‘세트장’이 아닌 그 유명연예인들의 실제 집과 거기 사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어린이 시청자들도 보기 때문이다. 별 불편 없이 보는 이들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꿈꾸기조차 어려웠던 다른 세상 속 집을 보는 어린이들도 있다. 육아예능에서 ‘작고 허름한 집’은 나오지 않는다.

“그 어린이는 어떤 상황에서 TV를 보고 있을까? 누구와 볼까? 부모와 함께 볼까? 혼자 볼까? 무엇을 하면서 볼까? TV가 놓인 곳은 어디일까? 그 어린이는 화면 속 아이를 부러워할까? 자기 현실과 너무 먼일이라 아무 상관이 없을까? 만일 상관이 없다면 아무 상관이 없을까? 그런 생각에 화면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102쪽)

어떤 어린이들은 TV로 세상을 배울 텐데, 특히 외로운 어린이들이 그럴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에 어린이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책에 썼다. 

▲ KBS 육아예능 '슈퍼맨이 돌아왔다'(위), MBC 육아예능 '아빠! 어디가?' 화면 갈무리
▲ KBS 육아예능 '슈퍼맨이 돌아왔다'(위), MBC 육아예능 '아빠! 어디가?' 화면 갈무리

 

‘육아예능’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지난해 자녀 앞에서 아버지가 맞는 모습을 연출해 아이를 울린 뒤 인터뷰까지 진행한 육아예능 프로그램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징계를 받았다. 사회적으로 공론화된 이 사건에 대해 저자는 ‘제작진이 특별한 악의가 없었더라도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바로 “어린이를 감상하고 싶어하는 것”(226쪽)이다.  

흔히 ‘어린이를 소비한다’는 그 표현을 저자는 자세하게 풀어 설명했다. 때로 어른들은 아이가 너무 예뻐서 아이에게 장난을 치고 혹시 아이가 울면 그 모습도 귀엽다고 생각한다. 울면 달래주면 되고, 잠깐 울었다고 큰 문제가 있겠느냐는 발상이다. 저자는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할 수 없다”며 이러한 ‘대상화’가 문제라고 썼다. 

[관련기사 : 아이 앞에서 아빠 맞는 모습 연출 ‘슈돌’ 행정지도]
[관련기사 : 독일에 육아 예능이 없는 이유]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어린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또래와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차라리 낫다는 주장이다. 그런 맥락에서 5월5일 하루는 “모든 TV채널에서 어린이 시청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방영하면 좋겠다”(243쪽)는 상상도 했다. 어린이가 주인공인 철지난 영화를 틀어주는 게 아니라 어린이들이 원하는 최신 영화나 드라마,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고 관심있는 뉴스보도 등이 필요하다는 제안이다.

이 책을 통해 어른들은 어린이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하루는 저자가 아홉 살 어린이에게 ‘잉여생산물’과 ‘물물교환’을 설명하는 시간이었다. 질문을 던졌다. “농사를 짓다 보니, 필요한 것보다 많이 생산하게 된 거야. 우리 마을에서 다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이!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31쪽) 그러자 아홉 살 어린이의 대답은 “나눠 줘요!” 답을 하는 그 어린이 얼굴은 다른 답이 있을 리 없다고 확신하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잃었던 인간미를 일깨워주는 장면이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에 ‘헌신적으로 참여한 집단’이 어린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른은 어린이들이 진짜로 ‘놀 권리’를 보장해야 하지만 지난 1년간 어린이들은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제대로 가지 못했고 마음껏 놀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경제생활과 육아를 동시에 감당했을 학부모 걱정은 있었지만 아이들의 ‘놀 권리’를 진지하게 고민하진 않았다.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사계절 펴냄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사계절 펴냄

 

저자는 이주영의 ‘어린이 문화 운동사’의 한 부분을 인용하며 한국 사회가 얼마나 아이들에게 무심했는지 보여준다. 역사학자들도 1960년 4·19혁명 당시 어린이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무관심하다는 지적이다. ‘어린이가 뭘 알겠냐’는 고정관념이 진실을 가렸을지도 모른다. 박도일·안병채·임동성·정태성·강석원·전한승 등 초등학생들은 총상 등의 이유로 4·19 당시 희생당했다. 

우연히, 시위현장에 지나가다가, 키가 작아 안 보여서, 이렇게 많은 어린이가 희생된 걸까. 저자의 의문은 사망한 전승한 어린이가 다니던 수송초등학교의 강명희 어린이(4학년)의 시를 통해 해소된다.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말도 안 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어리다는 이유로 어린이들은 꽤 많은 곳에서 배제돼 있었다. 

작가는 어린이들과 경험을 보여주며 어떤 어른이어야 하는지 일깨워준다. 

지난해 코로나 초기 ‘마스크대란’때 일이다. 방역 마스크를 사기 위해 줄을 길게 섰다. 그러다 한 할아버지가 대뜸 소리쳤다. “거기, 다 마스크 살 거예요? 거 애들도 살 수 있나?”(198쪽) 어머니와 두 자녀를 향한 호통이었다. “그럼요, 얘네도 한명씩인데요.” 

생각해보면 참 웃긴 질문이다. 어린이는 줄을 서면 안 되나? 어린이는 마스크를 살 수 없나? 어린이는 코로나에 안 걸리나? 아니면 어린이들은 코로나에 걸려도 상관없나? 그들이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이었어도 그런 말을 했을까? 어린이는 온전히 한명으로 대접받는 걸까? 

이처럼 어린이차별은 은연중에 있다. ‘노키즈존(No Kids Zone)’이 크게 뭇매를 맞자 이젠 ‘노 배드 페런츠 존(No Bad Parents Zone)’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시끄럽게 하는 ‘나쁜부모’를 내쫓겠다는 발상이다. 결국 조용한 아이들만 받겠다는 것이고 저자는 이런 발상 자체가 약자혐오라고 지적한다. 조용한 아이인지는 손님으로 받아봐야 알지, 식당 문 앞에서 얼굴만 보고 어떻게 알까.

종종 서구 영화를 보면 식당이든 기차에서든 어른처럼 행동하는 어린이 모습이 나온다. 처음 보는 어른과 악수를 나누며 자신의 생각을 ‘어른스럽게’ 말하는 어린이들을 보며 “역시 선진국의 아이들은 다르다”는 반응도 있다. 

한국에 이런 어린이를 찾기 어려운 이유는 노키즈존을 만들다 못해 ‘노배드페런츠존’까지 만들어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집밖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사회 분위기 탓도 있다. 아이들은 식당이, 기차가, 처음 보는 어른이 낯설 수밖에 없다. 그러니 차분히 앉아있지 못한다. 또 온전한 ‘한명’으로 대접받은 경험이 없으니 스스로 굳이 ‘한명’의 몫을 하지 않아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 한명으로 대하되 그들 눈높이에 서줘야 한다. 

서점에서 색칠공부책을 꼭 쥔 어린아이가 아빠랑 계산대 앞에 섰다. 아빠가 계산을 이유로 책을 달라고 하자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서점 사장은 “따로 계산해드릴까요”라고 아이에게 물었다. 계산을 마치자 사장은 아이에게 “따로 담아 드릴까요”라고 물었고 아이는 그러겠다고 했다. 

어린이 눈높이에서 ‘한명’으로 대한다는 건 이런 것이다. “아유, 귀여워 몇 살이야? 아빠 드려야지”(45쪽)와 같은 예상 가능한 질문은 정답이 아닐지 모른다. 저자는 이 서점 사장을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주는 어른’이라고 표현했다. 

더 나아가 어린이들의 사회생활도 인정해야 한다. 저자는 마리아 몬테소리의 ‘어린이의 비밀’에 나온 ‘코풀기 수업’에 대한 경험을 전했다. 몬테소리는 ‘코풀기 수업’을 재밌는 수업이라고 생각하고 손수건 사용법 등을 가르쳤다. 어린이들은 전혀 웃지 않았고 오히려 진지하게 수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몬테소리는 “어린이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건지 모른다고 분석했다. 어린이들은 코를 흘리는 일 때문에 어른들에게 야단을 맞고 때론 부끄럽기도 했을 것이다. 다만 제대로 코 푸는 방법을 몰라서 겪는 일이었다. 

▲ 어린이  사진=pixabay
▲ 어린이 사진=pixabay

 

어른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보여준 또 다른 책이 있다. 

작가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은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를 보여줬다. ‘부지런한 사랑’은 글쓰기 교사로 일하며 보고 느낀 다양한 생각과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자신의 수업에 온 아이들 글도 인용했다. 그 제자들이 몇 살 때 쓴 글을 정확히 얼마나 인용하는지, 왜 인용하고 싶은지 등을 제자들 집에 연락해 제자와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 작업한 책이다. ‘애들이 쓴 글인데 어때’와 같은 마인드로 제멋대로 인용하지 않은 것이다. 함께 읽어볼 만한 책이다.  

작가는 “이 세상에 자기 손바닥에 글자를 써주는 일곱 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라고 말할 정도로 따뜻하고, 글쓰기 교사라는 직업윤리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엔 자기 손바닥에 글자를 써주는 어린이의 부탁을 거절할 사람이 많고, 어쩌면 세상은 어린이에게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분위기다. 
 
그래서 이런 책이 더 의미가 있다. 사실 어린이만의 얘기가 아니다. 누구나 인간의 온기를 느껴가며 누군가를 사랑하고 산다. 어차피 인간미를 느끼고 사랑하는 과정이 서로의 동심을 찾아주는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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