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코로나19 확산세 속에 사상 첫 ‘랜선 기자회견’을 가졌다. ‘각본 없는 기자회견’이라는 전통은 이번에도 이어졌고, 유례없는 온·오프라인 병행방식도 큰 무리 없이 진행됐다. 다만 자연스러운 형식에 치중하면서 내실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뒤따르고 있다.

18일 오전 진행된 기자회견은 청와대 춘추관, 화상, 온라인 채팅창을 오가며 이뤄졌다.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지키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과 동석하는 인원을 최소화하고 다양한 질문 창구를 열어둔 것이다. 온·오프라인 실시간 질문 기회를 얻은 120명 중 20명은 춘추관 현장, 100명은 화상회의 시스템을 통해 참석했다. 두 자리 모두 얻지 못한 기자 약 160명은 별도로 마련된 카카오톡 채팅방에 질문을 올렸고 그 중에서 가장 추천을 많이 받은 질문이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번호표’ 선택 기다린 기자들…외신 최다, 조·중·동 0회

문 대통령은 이번에도 즉흥적으로 질문자를 지목했지만, 예년처럼 질문 기회를 얻고자 ‘튀는’ 기자는 없었다. 기자들에게 부여된 번호를 문 대통령이 무작위로 호명하는 방식이라 질문 경쟁이 소용 없어졌기 때문이다. 120명의 기자들은 청와대에서 나눠준 번호표를 조용히 들고 대통령이 불러주길 기다렸다. 화상 참석자 중에서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걸거나, 영하의 날씨 속 바닷가(갯벌 앞)에서 기다린 기자들도 있었지만 끝내 선택받지 못했다.

▲18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2021년 문재인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청와대
▲18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2021년 문재인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청와대

120여분의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질문 기회는 27명(현장·화상 24명, 채팅 3명)의 기자들에게 돌아갔다. 전체 참석자 10%에 미치지 못하는 비율이다. 매체별로는 외신이 6회로 가장 많았고, 경제지·중앙일간지 각 4회, 지상파·통신사 각 3회, 종편·케이블 2회, 지역지·전문지 각 1회 등이다. 채팅 질문 3건은 기자회견 송출 담당 ‘키(KEY)사’인 SBS 기자가 문 대통령에게 대신 전했는데, 각 질문자들의 이름·소속은 공개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보수일간지 소속 기자들은 질문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일부 기자들은 청와대가 기자별 고유번호를 알고 있었기에 모종의 조율이 이뤄진 것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청와대는 그러나 대통령에게 기자회견 방식만을 전했을 뿐 몇 번이 어느 매체의 어떤 기자인지 절대 공유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실제 기자회견장에서 대통령은 기자들 손에 들린 번호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질문자를 선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인터넷 연결 문제로..” 선택 받았지만 기회 날린 기자들

겨우 질문자로 선정됐지만 인터넷 연결 문제로 기회를 날린 경우도 있었다. 질문을 시작하자마자 화면이 끊겼던 한 기자는 다시 주어진 기회에도 끝내 질문을 마치지 못했다. 역시 화상으로 참석한 외신 기자의 경우 질문 소리가 끊기자 답답함에 마스크를 벗기도 했지만 기회는 다른 기자에게 돌아갔다. 앞서 청와대는 기자회견을 하기 전 15일 1·2차 리허설, 17일 3차 리허설(오후 12시, 2시), 18일 4차 리허설(오전 8시 이후 수시 진행) 등 사실상 최소 여섯 번의 리허설을 진행하면서 개별 기자들의 연결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현장에서의 돌발 상황은 막을 수 없었다.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일문일답의 근본적 한계도 드러났다. 우선 주제의 편중이다. 청와대는 △방역·사회 △정치·경제 △외교·안보 등의 순서로 질문을 받으려 했지만 분야별 안배에 실패했다. 질문 기회가 단 한 번인 만큼 주요 관심사인 정치 분야에 질문이 집중됐다. 외신기자들이 선택을 많이 받은 만큼 외교·안보 관련 질문도 비중이 높았다. 이날 질문을 주제별로 나누면 △외교·안보 8회 △정치 7회 △경제 6회 △방역 5회 △사회 2회 △언론 1회 △교육 1회 순이었다. 외교·안보 질문의 경우 미국·북한과의 관계를 동시에 묻는 질문이 8건 중 5건으로 가장 많았다. 정치 분야는 이른바 ‘추미애·윤석열 갈등’(3건), 전직 대통령 등 사면(2건) 순이다.

이는 의도와 다르게 소외된 영역을 만들었다. 특정 주제 중심의 질문이 집중되면서 노동, 환경, 인권 등의 사안은 기자회견에서조차 다뤄지지 못했다. 지역 언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18일 기자회견 직후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성명에서 “기자회견에서 지명하신 기자 중 비수도권 언론사의 기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점에 아쉬움을 표한다”며 “대통령이 약속하신 향후 국민과의 소통에서 지역 언론과의 대화에 노력해 주시길 당부드린다”고 밝혔다.

▲18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2021년 문재인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청와대
▲18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2021년 문재인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청와대

질문 분야·형식 아쉬움 남아…대통령 언론접촉 줄일까 우려도

청와대 출입기자들 사이에서도 질문 형식이 보완될 필요가 있다는 반응이 나왔다. 질문 내용 조율이 아닌, 분야별 질문자 분배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의견이다. A기자는 “원하는 분야가 아니더라도 내 번호가 들리면 무조건 질문을 해야 했다. 선택 받으면 우선순위에 있는 질문부터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런 한계 속에서 채팅 형식의 질문이 유용했다는 의견도 있다. B기자는 “톡 게시판을 통해 다수 기자들의 의견 수렴을 해서 ‘랜덤’ 질의응답 부작용이 보완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더 이상 ‘각본 없는 기자회견’에 매몰될 필요가 없다는 시각도 있다. 온라인으로 기자회견을 지켜본 C기자는 “맥이 풀리는 기자회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질문이 너무 중구난방이라 그런지 기자회견을 보고 나서 도대체 어떤 내용을 들었는지 파악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질문한 의도와 다른 답변이 나왔을 때 재질문이 불가능한 상황이니 계속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며 “신년 기자회견이면 국정 어젠다를 제시하거나 확실한 방향성을 기대하게 되는데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한편 문 대통령이 이번 기자회견을 계기로 언론 접촉을 더 줄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기자회견 직후 문 대통령의 ‘입양 발언’ 등에 비판이 집중되면서 언론 대면은 실익보다 부작용이 크다는 인식이 청와대 내부에서 전해지고 있다. “기자회견만이 소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힌 문 대통령의 발언 또한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다만 이번 기자회견을 총괄한 탁현민 의전비서관은 페이스북에서 ‘소통 부족’이라는 지적을 반박하면서 “대통령과 언론, 대통령과 국민이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더 많이 만들어 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