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백신 접종을 시작한 나라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언제 내 차례가 돌아와 백신을 맞을 수 있을지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 백신이 효과가 있는지, 부작용은 없는지, 효과가 있다면 얼마나 오래 효과가 유지되는지에 대한 논란은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분명히 알고 있는 것도 있다. 백신 접종을 얼마나 빠른 속도로 진행하든 사망자는 곧 7만 명에 이를 것이고 그들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허망한 이유다.

약자들의 고통이 크다. 기댈 곳 없는 그들의 어깨는 쓸쓸하다. 가난한 지역의 사망자 수치가 전국 평균의 두 배에 달한다. 전파력이 더 강력해졌다는 변종 바이러스가 처음 발생한 곳도 가난한 런던 동부지역이다. 올여름, 짧은 석 달 동안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자그마치 37만 명에 달한다. 내년 중반쯤엔 실업자 수가 260만 명에 이를 거라는 전망이 돈다. 실직자의 태반이 서비스와 생산직 그리고 창작 노동자들이다. BBC뉴스에 출연한 한 가난한 지역 (Burnely)의 성당 신부들이 말을 잊지 못하고 눈물을 훔친다. 무료밥차에 매달리는 가난한 주민들의 모습이 너무도 비참해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방송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회원이 1200명에 달하는 PD들의 연합, Viva LaPD는 올해 수많은 프리랜서 PD들이 일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고 그중 55%는 정부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방치돼 있다고 전했다. 영화와 방송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  ‘Film&TV Charity’와 ‘Woman in Film and TV’도 회원의 90%가 실직상태에 있고 70%가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설문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45%는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정부가 237억 원에 이르는 긴급자금을 미디어와 창작 분야의 프리랜서들에게 풀었는데도 도움을 받지 못한 대상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다. 

미디어 분야의 단체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관련 기관을 대상으로 전방위 로비를 펼치고 있다. 그 결과 약간의 성과도 있었다. Film&TV Charity의 경우 올 초 넷플릭스와 워너 미디어, BBC로부터 37억 원에 이르는 기부금을 받아 최대 370만 원을 카메라 뒤에서 일하는 프리랜서 창작자들에게 지원했다. Film&TV Charity는 금전적 지원뿐 아니라 생활고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프리랜서들에게 주 7일 24시간 정신과 상담을 포함해 다양한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 런던에 위치한 BBC.
▲영국 런던에 위치한 BBC.

공영방송도 나섰다. BBC는 코로나로 인해 상당한 재정감축을 감행해야 할 상황에 직면해 있고 그에 따라 상당수의 프리랜서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어려움에 부닥친 프리랜서들을 위한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지난 5월, BBC는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가 코로나 사태를 맞아 실직한 600여 명의 프리랜서에게 남은 계약 기간만큼 기존에 지불하던 급여의 100% 전액을 지급했다. 그리고 아픈 경우 병가급여 신청도 가능하도록 하는 한편 정식 직원들에게만 제공하던 직원복지프로그램(Employee Assistance Programme:EAP)도 똑같이 이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BBC는 직원 홈페이지를 통해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프리랜서 여러분이 시청자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에 감사하다”면서 실직한 프리랜서들에게는 다른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어떤 어려움이든 이메일이나 사내 상담 전화를 통해 문의해 달라”며 관련 부서의 연락처를 공개했다. 그러나 이런 BBC의 따듯한 배려는 BBC의 자발적인 조치에 의해 실시된 것도 아니었고 충분하다고 볼 수도 없었다. 

애초 BBC는 고용을 유지해야 하는 공공기관이 아니며, 따라서 정부로부터 고용유지 기금을 받을 수도 없기 때문에 프리랜서에 대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버텼다. 이런 BBC의 태도에 대해 언론인 협회가 나서 정부를 상대로 법적 조치하겠다고 압박했고 이에 BBC가 항복한 것이었다. BBC의 지원은 비슷한 상황에 처한 3000여 명 중 겨우 600여 명을 대상으로 해 턱없이 부족한 조치라는 비판도 나왔다. 방송사에 대한 신뢰가 올바른 메시지 전달과 완성도 높은 프로그램에 의해서만 쌓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처럼 어렵고 힘들 때 울타리 밖 동지들을 배려하고 그 고통을 나눠질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외부로는 신뢰를, 내부로는 자긍심을 쌓는 일이다. 궁극적으로 세계적인 미디어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토대가 될 수도 있다. 오늘날 프리랜서 인력 없이 방송이 가능한 방송사는 없다. 그런데도 프리랜서는 프로그램이 폐지되면 즉시 버릴 수 있는 부품처럼 취급된다. 계약이 조기 종료되더라도 일정 기간 생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코로나 같은 사태로 일이 없어져 고통받는 프리랜서들이 작은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한국도 방송사와 제작사 그리고 정부 기관이 앞장서서 기금을 조성하고 운영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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