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의 월성원전 1호기 폐쇄 감사를 앞두고 관련 자료를 삭제한 산업통상자원부 간부 2명이 공용전자기록 손상, 감사 방해 혐의로 지난 4일 구속된 소식이 신문 지면과 방송화면을 채우는 사이, 주류언론이 주목하지 않은 의미 있는 예산이 국회를 통과했다. 원전에서 방출되는 방사성물질이 유발하는 건강피해에 대한 조사 수행 예산이 최초로 반영된 것.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2일 국회 본회의 의결을 통해 “월성원전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건강권 보호에 필요한 정부 차원의 역학조사 진행 예산 16.9억 원이 2021년도 환경부 본예산에 확정 편성됐다”고 밝혔다. 양이 의원은 환경부, 원자력안전위원회, 산업통상자원부의 국장급 회의를 주관하며 협의와 조율을 통해 건강영향조사 실시를 위한 예산편성 논의를 주도했다. 

이번 예산편성으로 원전의 방사선 방출과 주변지역 주민들의 방사선 관련 암(위암, 폐암, 유방암, 간암, 갑상선암) 발생의 상관관계를 정부 차원에서 직접 조사하고 사후관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월성 1호기. ⓒ연합뉴스
▲폐쇄된 월성 1호기. ⓒ연합뉴스

이번 예산반영으로 이르면 내년 상반기부터 월성원전 인근 주민을 대상으로 이루어질 ‘주민건강영향조사’는 주민들이 겪는 건강문제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사로 결과에 따라 향후 주민들이 요구하는 문제해결 및 재발방지대책 마련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양이원영 의원은 “원전을 운영하며 국민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국가가 져야 할 당연한 책임”이라며 “이번 예산편성을 시작으로 오랜 기간 고통받고 있는 주민을 위한 제대로 된 대책 마련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정부는 지난 1991년부터 2011년까지 무려 20년에 걸쳐 원전 인근 주민 3만6000명을 조사했고, “원전과 암 발병 사이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2015년 서울대 보건대학원 백도명 교수팀은 ‘원전종사자 및 주변지역 주민 역학조사 관련 후속연구’를 통해 “원전의 방사성물질과 암 발병은 인과관계가 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원전 인근 주민들은 끝없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앞서 지난 11월3일 국회에서 열린 ‘핵발전소 주변지역 갑상선암 피해주민 증언대회’에 참석한 경주 월성원전 주민 황분희씨는 “월성에서만 34년 살았다. 손자들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피폭을 당했다. 갑상선 암 수술 이후 물에 젖은 솜처럼 피곤하다. 다음 세대에 이런 고통을 줘선 안 된다”며 “한수원이 잘못을 인정하고, 주민을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황씨는 “한수원은 갑상선 암도 핵발전소와 관련 없다고 한다. 삼중수소 방사능 역시 자연방사능에 다 있기 때문에 발전소 피해라고 안 한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것 같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월성 1호기. ⓒ연합뉴스
▲폐쇄된 월성 1호기. ⓒ연합뉴스

부산 고리 원전 주민, ‘균도 아빠’ 이진섭씨는 “2010년에 장모님이 위암에 걸렸고 나는 직장암 선고를 받았다. 앞집도 암이고, 뒷집도 암이었다. 아이는 발달장애였다.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암에 걸렸는지 알고 싶었다.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언론사가 있는데, 보도해주는 곳은 거의 없었다”고 말한 뒤 “핵발전소 주민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왜 우리가 밝혀내야 하나. 법원은 우리보고 과학적 근거를 대라고 했다. 1심 승소하고 2심 패소했지만 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원전 주변 마을의 한을, 국민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2014년 1심 법원은 고리원전 인근에서 20년 넘게 산 ‘균도네 가족’의 암 발생과 원전의 연관성을 일부 인정해 배상 판결을 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지난해 8월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정반대로 한수원 손을 들어줬다. 저선량(적은 양의) 방사능 피폭과 암 발병 여부를 입증할 국내외 연구 결과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난 1월 대법원이 2심 결과를 확정하면서 소송은 끝났지만, 원전 주민 618명이 같은 취지로 진행하는 집단 손해배상소송 1심이 아직 진행 중이다. 앞으로 정부 조사에서 암과 방사능 피폭 사이 인과관계가 있다고 밝혀진다면, 앞선 균도네 소송에서의 법원 판단 근거가 바뀔 수도 있다. 16.9억원이 공무원 2명 구속보다 더 중요한 뉴스일 수 있는 이유다.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양이원영 의원은 지난 5일 페이스북을 통해 “매년 1000억 원 적자 나고 30년 전 안전기준으로 수명 연장해서 위법판결까지 받은 월성원전 1호기다. 그냥 둬도 가동이 중단될 수밖에 없던 원전이었다. 삼중수소가 다량 방출되고, 1983년 전산시스템조차 교체하지 않은 노후원전, 툭하면 고장 나서 멈추는 원전폐쇄 결정은 경제성, 안전성, 주민수용성 등을 종합적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밝히며 “검찰이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하고 구속영장까지 청구하며 월성1호기 사건을 정치수사로 키웠다. 검찰개혁이 절실하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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