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국인 뉴스진행자가 TBS를 상대로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했다. 2012년 9월부터 올 봄까지 TBS 영어방송 eFM의 일일 아침 7~9시 뉴스프로그램 ‘This Morning(디스 모닝)’을 진행한 D. 알렉스 젠슨씨다. 그는 지난 4월 구두로 ‘함께하지 못하게 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널리 프리랜서로 간주돼온 라디오방송 진행자가 법적 쟁송을 택하는 건 이례적이다. 무슨 까닭일까.

알렉스 젠슨씨는 TBS가 지난 7년 간 서면계약 없이 그에게 ‘프리랜서’ 경계를 넘어선 업무 지시와 통제를 했고, 일방적으로 부당한 계약해지 통보를 했다고 주장한다. 젠슨씨는 대리인 공문을 통해 문제 제기했지만 TBS는 묵묵부답이었고, 부당해고 구제신청에 이르렀다. 젠슨씨가 겪은 노동조건은 국내의 이른바 ‘프리랜서’ 방송진행자들이 노출된 환경이기도 하다.

계약서 없이 8년…주먹구구 업무외 지시, 구두통보로 “끝”

TBS는 젠슨씨가 일하는 8년 동안 한 차례도 정식계약을 하지 않았다. 젠슨씨는 2012년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TBS 담당자에게 업무 계약서가 있는지 물었지만 이렇다 할 답변을 듣지 못했다. 그는 “TBS는 나와 계약서를 쓰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나와의 업무관계를 모호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며 “해외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영국과 미국 채널인 BBC, LBC, ESPN, MOTORS TV 등에서 프리랜서 진행자로 일했다. 그는 “방송사들이 프리랜서의 휴가를 제지하지 않은 건 물론, 프리랜서는 언제 일하고 그만둘지를 택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방송사의 지시를 따라 업무수행하지 않았다”고 했다.

젠슨씨는 “TBS는 프리랜서 경계를 넘나드는 업무와 지시를 수없이 했다”고 말했다. 젠슨씨는 TBS 담당자의 요청으로 광고 시간에 방송될 TBS의 공지나 캠페인 대사를 녹음했다. 그의 아들이 TBS 요청에 녹음을 해준 적도 있다. 지시는 주먹구구 식으로 이뤄졌다. 계약서는 없었고, 프리랜서로선 건건이 수입이지만 TBS가 보수를 지급한 적은 없다. TBS는 사전 급여 상의 없이 그에게 행사 MC 업무도 요청했다. 젠슨씨는 “TBS가 사전에 보수 관련 언급 없이 행사진행을 요청해, 매번 돈이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곤 했다”고 했다.

▲중앙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 재심을 신청한 TBS eFM 전 진행자 알렉스 젠슨씨. 사진=김예리 기자
▲중앙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 재심을 신청한 TBS eFM 전 진행자 알렉스 젠슨씨. 사진=김예리 기자

알렉스 젠슨씨는 ‘그만두라’는 통보 전까지 TBS eFM의 ‘얼굴’ 노릇도 했다. 미디어재단 TBS가 출범한 지난 2월엔 사장이 참여하는 리본커팅 행사에 eFM을 대표하는 인물로 얼굴을 비췄다. TBS 안내데스크 벽면엔 그의 얼굴이 붙었다. 젠슨씨는 TBS 측 담당자의 요구로 TBS 라디오 광고시간에 내보낼 공지사항 방송 내용을 녹음했다.

그는 “TBS가 내게 단순한 프리랜서를 넘는 존재로 보고 지시 이행을 기대했음을 보여준다”며 “TBS와의 기존 계약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 가격협상을 먼저 거론하지 못했다”고 했다.

반면 TBS 측의 업무 통제는 엄격했다. TBS 측은 진행자의 발언 주제를 제한했다. “TBS는 LGBTQ 인권이나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피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복수의 전현직 TBS 제작진에 따르면, TBS는 2018년 7월 TBS eFM의 ‘커트에이친스 쇼’가 서울퀴어문화축제를 다뤘다는 이유로 PD를 뺀 커트 에이친스 진행자 비롯 제작진을 전원 해고한 적도 있다. 휴가도 TBS의 구두 승인을 받고 갔다. 회사 방송일정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TBS 관계자는 ‘커트 에이친스 쇼’ 제작진 해고와 관련, “내용이 방송사와 추구하는 바와 맞지 않아 잡음이 있던 건 사실”이라면서도 제작진 해고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노동위 각하심판위원은 비정상 계약’”

서울지노위는 지난 9월 젠슨씨를 ‘노동자’로 볼 수 없어 사건 자체를 들여다보지 않겠다는 ‘각하’ 판정을 내렸다. 서울지노위 심판위는 젠슨씨가 ‘자유로운 MC’였다는 회사의 주장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TBS가 젠슨씨의 겸직을 막지 않고, TBS의 복무 규정도 적용하지 않았으며, 건별 보수를 지급했다는 등 이유다. TBS 측은 젠슨씨에게 업무 범위를 벗어난 지시를 하지 않았고, 그가 재량에 따라 대본 내용도 고칠 수 있었다고도 했다.

노동위는 초과 업무 지시가 이뤄졌고, 계약서나 보수 관련 합의가 없었는데도 취약한 지위 탓에 재차 묻지 못했다는 젠슨씨 해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tbs의 처우가 프리랜서로서도 부당하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 노동위 심판위원은 초심 심판정에서 “아무런 계약 자체가 없다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다. 더욱이 서울시 산하에 있던 공적 기관으로선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TBS eFM 제작 담당자는 통화에서 “방송사의 진행자 교체는 당연한 일이며, 새로운 진행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부당해고’는 적절치 않은 표현”이라고 밝혔다. 회사 지휘감독에 따라 진행 내용이 정해졌고 업무 외 지시가 있었다는 젠슨씨 주장에는 “역량에 따라 MC 역할을 했기 때문에 아나운서처럼 했다는 건 무리한 주장”이라고 밝힌 뒤 “젠슨씨가 한 차례 본인의 커리어를 위해 무보수로 리포트 제안을 받아들인 적은 있다. 그 외 무보수 업무지시는 없었다”고 했다. 프리랜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이유에는 “방송사가 진행자와 정식 계약을 한단 얘기는 들어본 적 없다”고 했다.

▲중앙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 재심을 신청한 TBS eFM 전 진행자 알렉스 젠슨씨. 사진=김예리 기자
▲중앙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 재심을 신청한 TBS eFM 전 진행자 알렉스 젠슨씨. 사진=김예리 기자

“방송사들, 프리랜서를 직원처럼”…해외선 ‘계약종료수당’·소송권리보장

방송사들의 ‘프리랜서 경계 넘기’는 국내 방송진행자를 상대로도 비일비재하다. 이기상 한국방송진행자연합 회장은 “방송사들이 아나운서직을 외주화한 뒤, 진행자 자리를 프리랜서로 채우면서도 직원에게 대하듯 업무지시하는 경향이 있다. 대전MBC 여성아나운서의 경우 업무 시간까지 정규직과 똑같이 정해뒀던 극단적 사례”라며 “그러나 일반화한 일이라 회사에 문제제기했다는 것 자체로 회사로선 낯설 것”이라고 했다.

이 회장은 “고용형태가 열악할 뿐 아니라 시장에서 진행자 공급이 포화 상태라, ‘을’의 처지인 진행자들이 대규모 방송사에 계약서를 요구하거나 부당 업무지시를 거절하지 못한다. 오히려 무보수로 추가 업무를 하겠다고 제안해야 할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고 했다.

프리랜서들이 부당하게 계약해지를 당하지 않도록 방지하거나 보호할 구제수단은 없을까.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는 “회사가 계약서를 썼다면 프리랜서 노동자가 계약기간이나 해지조건 내용을 근거 삼아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방송계 프리랜서를 위한 표준계약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지만 방송사에 적용을 권고하는 데 그쳐 유명무실한 실정이다.

해외 방송사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프리랜서의 공정계약과 노동, 보수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캐나다 CBC는 ‘캐나다미디어길드 프리랜서지부’와 단체협약을 맺어 프로그램 개편으로 예상보다 조기에 계약이 종료되면 그간 출연료의 20%를 보전토록 하는 ‘계약종료수당’를 지급하고 있다. 미국 뉴욕시의 ‘프리랜서보호법’은 프리랜서도 서면계약과 임금지급 등에 고용주에 소송을 제기할 권리와 법률 서비스를 규정하고 있다.

이기상 회장은 “부당한 처우를 겪은 프리랜서 진행자들은 각자 상처를 받고 사그러들기 일쑤다. 이런 고민과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단체를 만들게 된 면도 있다”며 “방송사가 프리랜서 진행자와 계약관계를 불공정하게 이용하지 못하도록 공적 규제틀이 필요하다”고 했다.

젠슨씨는 이달 초 중앙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재심을 신청했다. 그는 “TBS가 계약서를 쓰지 않고, 어떤 사과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도 이길 수 있다는 게 놀랍다”며 “핵심은 TBS가 나를 프리랜서로 계약한 뒤 직원처럼 대했다는 것이다. 노동위가 이 모든 것을 고려해 흑백으로 판단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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