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나온 분들은 한글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한글은 가림토 문자에서 유래한 것이며 세종대왕이 가림토 문자를 취사선택해 만든 것이 훈민정음이다. 가림토 문자는 인도와 수메르 왕국까지 퍼져있다. 내가 (KBS를) 퇴직한 후 연구한 결과다. 방송사가 언어 창달에 이바지해야 하는데 오히려 파괴하고 있다. 한글은 가장 과학적이고 세계적이고 우수하다.” (박상수 위원)

“(MBC에 있을 때) MBC 홈페이지에 접속해 원고지를 내려받아 아나운서가 발언하는 걸 받아쓰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가 다른 부서로 가는 바람에 못 만들었다. 우리나라 방송이 안타깝다. 우리나라 방송은 무엇 때문에 방송하냐. 개탄스럽다.” (이상로 위원)

박상수, 이상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이 신조어와 인터넷 용어를 프로그램 자막으로 썼다는 이유로 방통심의위에 불려 나온 방송사 관계자들에게 한 말이다. 심의위원들은 “방송사들이 신조어를 자막으로 쉽게 사용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신조어’ 제재를 할 때마다 누리꾼들은 ‘꼰대 심의’라고 비판한다.

▲ 지난달12일 방송된 MBC ‘놀면 뭐하니?’
▲ 지난달12일 방송된 MBC ‘놀면 뭐하니?’

방통심의위 방송심의소위원회(소위원장 허미숙)는 22일 오후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회의를 열고 KBS ‘옥탑방의 문제아들’, MBC ‘놀면 뭐하니?’, SBS ‘박장데소’, 채널A ‘도시어부’, JTBC ‘장르만 코미디’, tvN ‘놀라운 토요일-도레미 마켓’ 등이 방송심의 규정 ‘방송언어’ 조항을 위반했는지 심의한 결과 법정제재 ‘주의’를 의결했다.

KBS ‘옥탑방의 문제아들’(9월8일 방영분)은 ‘덕후’ ‘찐 성덕’ ‘오빠 말씀 is 뭔들’ ‘저는 그런 얘기 many 들어쒀요’ ‘Aㅏ...반려동물...?’ 등의 자막을노출했다. MBC ‘놀면 뭐하니?’(9월12일 방영분)는 ‘소장템’ ‘판타스틱한 혼자만의 티 타임’ ‘Go! 조지 Go!’ ‘This is 나전칠기~오케이?’ ‘so 당황’ ‘I love 지미유’ ‘Hey! Don’t 무시해 me’ ‘This is 신박기획’ ‘This is 뭉클!’ ‘은비 plz’ ‘완전체 환불원정대 in 만옥하우스’ 등 자막을 노출했다.

SBS ‘박장데소’(8월22일 방영분)는 ‘부캐’ ‘핵인싸’ ‘HIP한 데이트’ ‘디스 준비 중’ ‘빵덕’ 등의 자막을, 채널A ‘도시어부’ JTBC ‘장르만 코미디’ tvN ‘놀라운 토요일-도레미 마켓’ 등도 비슷한 자막들을 사용했다.

▲지난달12일 방송된 MBC ‘놀면 뭐하니?’
▲지난달12일 방송된 MBC ‘놀면 뭐하니?’

이날 의견진술자로 참여한 KBS 관계자는 “젊은 세대 언어를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MBC 관계자는 “이효리, 엄정화, 화사, 제시 등이 멤버인 환불원정대에 재미교포 출신이 한 명 있다. 한국말이 서툴다. 실제로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쓴다. 그게 하나의 캐릭터가 됐다”며 “프로그램 내에서 유재석씨의 역할은 미국에서 공부했고 헛물 들어간 제작자다. 캐릭터 성격을 살리다 보니 영어를 시도 때도 없이 섞어 쓴다. 이를 표현한 시각적 자막에 한글과 영어가 많이 섞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SBS 관계자는 “방송이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에 신선한 자막을 사용했다”고 해명했다. tvN 측은 “시대가 변하면서 신조어가 더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12일 방영된 tvN ‘놀라운 토요일-도레미 마켓’
▲지난달 12일 방영된 tvN ‘놀라운 토요일-도레미 마켓’

방통심의위는 6개 방송사에 이전부터 수차례 경고를 해왔다고 주장했다. 허미숙 소위원장은 “그동안 KBS는 5차례 행정지도, MBC는 3차례 행정지도, SBS는 행정지도 6번, tvN 행정지도 9번 등 수차례 방송언어 사용에 주의를 당부해왔다”고 밝혔다.

강진숙 위원은 “방송사가 저런 자막을 쓰면서 젊은 층 핑계를 대고 있다. 더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 제작진은 세대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신조어를 쓰는 수준이 아닌 어떤 문화를 창출해 나가도록 더 고민해야 한다. 후속 조치를 당부한다”고 말했다. 박상수 위원은 “방송사들이 바른 언어생활 정착에 앞장서야 하는데 파괴에 앞장서고 있다. 언제까지 가볍게 제재할 수만은 없다”고 밝혔다.

홀로 행정지도를 주장한 이소영 위원은 “방송에서 사용된 자막들이 현재 언어 생활 일부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한 방식으로 자막을 사용하기도 했다. 혐오 수준의 표현은 없었다”면서도 “카카오톡에서 쓸 수 있는 언어를 왜 방송에서 못 쓸까 생각할 수 있다. 방송이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는 게 정당화될 순 없다. 젊은 층에 맞추려고 자막을 사용했다는 건 면책되지 않는다”고 짚었다.

방통심의위가 신조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방송사들을 제재할 때마다 ‘꼰대 심의’ 논란이 있었다. 지난해 1월에도 4기 방통심의위는 ‘핵인싸’ ‘줍줍’ 등 신조어를 쓴 17개 프로그램에 무더기 행정지도를 결정했다. 박근혜 정부 때인 3기 방통심의위는 ‘빼박캔트’ 등 신조어를 쏟아냈다는 이유로 예능 프로그램에 중징계를 결정했다. 

지난해 5월 한국언론학회가 주최한 ‘방송 입말의 언어적 기능과 사회문화적 역할’ 세미나에서 김성규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신조어, 외래어, 외국어, 비표준어 등 제재에 “외부에서 강제적으로 심의하고 법적으로 문제 삼을 때 방송 표현은 위축될 수 있다. 신조어와 외래어 사용은 허용 문제라기보다는 의사소통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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