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 나오기 한 보름 전에 김광석(중대장)이가 밤에 ‘선도실’로 불렀어요. 다른 언니들이 밤에 불려 나가면 밀감이나 사탕 같은 걸 얻어와요. 그거 얻어먹으려고 앞에 서 있었어요. 그게 성폭행인 줄 모르고 멍청한 것들이. 빵도 가져오고 초코파이도 가져오고 산도도 가져오고 그러니까. 멍청한 것들이 그 언니가 나가고 언제쯤 온단 시간에 거기 서 있는 거예요. 그거 얻어 처먹으려고. 난 지금 그게 너무너무... 그 언니들한테 너무너무 미안한 거예요.”

형제복지원 피해자 박순이씨가 부산일보에 처음으로 자신이 당한 성폭행 이야기를 밝혔다. 여성 피해자가 인터뷰 전면에 나선 건 박순이씨가 유일하다. 부산일보는 지난 4월부터 “33인이 전하는 33년 절규의 증언. 살아남은 형제들 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이라는 주제로 33명의 형제복지원 피해자 증언을 유튜브 영상으로 제작했다.

▲지난 7월25일 부산일보가 13번째 증언자인 박순이씨를 인터뷰한 영상을 게시했다. 사진=부산일보 유튜브채널 화면 갈무리.
▲지난 7월25일 부산일보가 13번째 증언자인 박순이씨를 인터뷰한 영상을 게시했다. 사진=부산일보 유튜브채널 화면 갈무리.

박인근. 그는 전 형제복지원 원장이다.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운영됐다. 박인근은 부랑인 선도라는 명목으로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을 데려갔다. 부모나 가족이 있는 일반인도 강제로 데려가 강제노역, 구타, 암매장, 성폭행 등 끔찍한 일이 자행됐다. 당시 부산지역 일부 공무원과 경찰도 박인근과 한패로 움직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2년 동안 이곳에서 죽어 나간 사람만 513명이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숫자이지만 피해자들과 단체들은 사망자가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는데도 박인근과 그 일가에 대한 조사, 형제복지원 조사가 제대로 이뤄진 적은 없다.

▲부산일보는 지난 2월부터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33인을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유튜브채널 부산일보 화면 갈무리.
▲부산일보는 지난 2월부터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33인을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유튜브채널 부산일보 화면 갈무리.

오는 12월, 33년 만에 정부가 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시작한다. 이번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형제복지원 피해자 33인을 지난 4월부터 7개월째 인터뷰하고 있는 이대진 부산일보 디지털센터 영상콘텐츠팀 기자를 5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지난 2월 이대진 부산일보 기자(왼쪽)가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인 김대우씨의 부산광역시 범전동 자택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이대진 기자.
▲지난 2월 이대진 부산일보 기자(왼쪽)가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인 김대우씨의 부산광역시 범전동 자택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이대진 기자.

- 형제복지원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 아이템을 선정한 이유는?

“2014년 3월22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형제복지원의 진실’이라는 주제로 방송을 했다. 당시 배정훈 PD가 부산에서 일어난 사건이니 혹시 이 사건을 주도적으로 취재한 부산일보 기자가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했다. 찾아보니 특별히 부산일보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진 않았더라. SBS는 부산일보가 지역 언론이라서 심층적으로 보도했을 것을 예상하고 연락했을 텐데 심층보도한 적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SBS가 다루는 걸 보면서 부산일보가 해야 할 일을 타사가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채의식이 있었다.”

- 피해자 33인을 인터뷰할 생각을 어떻게 했나?

“올해가 형제복지원 사건이 일어난 지 33년 되는 해다. 파편적 인터뷰가 아니라 33명 피해자의 기억이 모이면 이 사건에 대한 하나의 큰 그림이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다른 언론에서도 형제복지원 사건을 수차례 다뤘지만, 피해자 증언 위주로 영상이 나간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동안 대부분 보도가 사건 전반을 다루면서 피해자 이야기는 한두 마디 정도만 담았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 증언을 듣는 기자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네 번째 인터뷰할 때까지 정말 힘들었다. 피해자분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권 유린을 당했는지 신랄하게 방송으로 보도된 적 없었다. 그분들 이야기를 면대면으로 인터뷰했다. 폭행은 기본이고 성폭행도 비일비재했다. 대부분 진실이라는 걸 알고 인터뷰하다 보니 마음이 힘들었다. 1시간 넘는 인터뷰 후 10분짜리 영상으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영상을 4~5번 이상 계속 봤다. 저는 잘 몰랐는데 주변에서 말수가 적어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계속 이 상태로 가면 제가 못 견딜 것 같았다. 죄송한 말이지만 6~7번째 피해자 인터뷰 때부터는 마음가짐을 달리했다. 피해자분들에게 감정 이입하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았다. 의식적으로 마음의 거리 두기를 하면서 인터뷰했다. 인터뷰할 때 꼭 동행하던 분이 김경일 사회복지연대 사무국장이다. 섭외 과정부터 함께했는데 의지가 됐다.”

▲부산일보가 만난 형제복지원 피해자 12인 인터뷰화면 갈무리. 사진=유튜브채널 부산일보 화면 갈무리.
▲부산일보가 만난 형제복지원 피해자 12인 인터뷰화면 갈무리. 사진=유튜브채널 부산일보 화면 갈무리.

- 피해자들이 인터뷰에 쉽게 응했나?

“2018년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신고센터 ‘뚜벅뚜벅’이 문을 열었다. 올해 초부터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센터가 개소된 상태라 피해자가 어느 정도 모인 상태였다. 세 번째 인터뷰까지 진행하고 나선 ‘증언하는 피해자분들을 무턱대고 다 믿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래서 4번째 인터뷰부터는 피해자분들이 도움을 줬다. 피해자분들이 진짜 피해자가 맞는지 몇 가지 질문을 통해 알아보기도 하고, 검증된 피해자를 먼저 소개해주시기도 했다. 인터뷰이에 대한 검증 작업을 거쳤다.”

- 13번째 증언자는 유일한 여성이다. 인터뷰 결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지금까지 24명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13번째 증언해주신 박순이씨가 유일한 여성이다. 형제복지원 여성 피해자분들도 상당히 많다. 여성 분 중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분들은 증언자로 나서기 쉽지 않다. 그분께서 머뭇거리다 이번 인터뷰에 처음으로 성폭행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울분을 토하면서 말하셨다. 그분이 부산일보에 인터뷰하면 아무래도 부산 지역 사람들이 많이 볼 테니 본인 인터뷰 내용이 적극적으로 알려져 여성 피해자들 증언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 사건 피해가 이렇게 심각한데, 왜 이렇게 공론화가 안 됐을까?

“피해자들 인터뷰 속에 답이 있다. 그동안 선뜻 이야기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 억울하면 말할 법도 한데 형제복지원이라는 곳이 그동안 부랑인들이 간다는 사회적 인식이 팽배했다. ‘네가 잘못했으니까 그렇게 됐겠지’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라 그곳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주홍글씨’가 새겨진다. 형제복지원에 계셨던 분들은 트라우마 때문에, 사회에 나와도 정착을 못해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사회는 ‘봐라. 너희가 이렇게 사니까 잡혀 갔다’는 식으로 이들을 바라봤다. 이후 한종선 피해자 대표가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최승우씨가 국회 의원회관 2층에 올라가 과거사법 개정안 통과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여 점차 알려지고 있는 것 같다.”

- 12월부터 정부가 33년 만에 본격적 진상 규명에 나선다.

“노무현 정부 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개정됐다. 형제복지원 사건부터 진상 규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알게 모르게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목숨을 끊은 분들이 많다. 인터뷰하는 와중에도 자살 시도하는 분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진상 규명이 제대로 돼야 한다. 박인근 원장 일가 재산에 대한 추적이 제대로 된 적 없다. 부정축재를 지금이라도 밝혀 환수로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쉽지 않겠지만 정의를 바로 세우려면 그 작업까지 해야 한다. 국가 차원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 배상 및 보상 문제는 빠져있는데, 진상 규명 이후엔 배·보상 문제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