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B청주방송이 부당해고로 숨진 고 이재학 PD 유족과의 소송 조정문안에 “사망 책임을 통감한다”는 내용의 삭제를 요구하면서 이 사건 4자 대표와의 합의를 위반했다. 유족, 언론노조, 시민사회대표 등과 최종 문구까지 확정해놓고 두 달이 지나 약속을 번복했다. 배후에 대주주 이두영 두진건설 회장의 반대 입김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청주방송은 지난 23일 청주지법에 고 이재학 PD의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과 관련한 법원 조정 결정에 이의신청서를 냈다. 지난 7일께 법원으로부터 받은 강제조정결정문 내용을 수용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24일 이의신청기한이 끝나기 하루 전이다. 

청주방송은 ‘회사 책임 통감’ 문구를 문제 삼았다. “청주방송은 고 이재학이 근로자 지위에 있고 청주방송으로부터 부당해고된 사실을 인정하며, 이재학 사망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유족에게 심심한 사과를 표한다”는 결정문 중 ‘이재학 사망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표현 삭제를 요구했다.

▲청주방송, 언론노조, 유족, 고 이재학 PD 대책위원회 등 4자 협의체 대표는 7월23일 오전 청주방송에서 조인식을 열고 이 사건 진상조사 결과에 따른 이행안 합의문에 서명했다. 강제조정결정문도 이 합의 내용에 포함됐다. 사진=손가영 기자
▲청주방송, 언론노조, 유족, 고 이재학 PD 대책위원회 등 4자 협의체 대표는 7월23일 오전 청주방송에서 조인식을 열고 이 사건 진상조사 결과에 따른 이행안 합의문에 서명했다. 강제조정결정문도 이 합의 내용에 포함됐다. 사진=손가영 기자

 

이는 지난 7월 타결한 ‘4자 대표자 합의’ 위반이다. 청주방송은 유족, 언론노조, 시민사회대표(고 이재학 PD 사망 대책위)와 지난 7월22일 공식 사과·책임자 처벌·고인 명예회복·재발방지 등을 골자로 한 이행안에 합의했다. 강제조정결정문은 이 합의에서 이미 확정됐고 청주방송은 어떤 수정 없이 조정 절차를 마친다고 약속했다. 50여일 긴 논의 끝에 타결된 조정문안이다. 

조정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합의를 위해 유족이 양보한 결과여서다. 유족은 이재학 PD가 생전 제기한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이어받아 청주방송과 2심을 진행 중이다. 이 PD가 “다른 ‘무늬만 프리랜서’들을 위해 선례를 남기겠다”며 시작한 소송이다. 그러나 청주방송 비정규직 처우 개선과 같은 다른 의제 합의를 위해 회사 요구에 맞춰 소송을 취하키로 합의했다. 이를 법원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강제조정)으로 매듭짓기로 한 것.

합의 위반 배후에 청주방송 이사회가 있다. 일부 이사들이 합의가 끝난 이행안을 부정하고 경영진에게 내용 수정을 재차 요구하고 있다. 특히 이 가운데 대주주 이두영 두진건설 회장이 거센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 회장은 이 PD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20년 간 대표이사를 역임한 청주방송 실질 소유주다. 이 회장은 지난 5~6월 이행안 합의 과정에서도 회사 책임을 부인하면서 경영진을 압박해 협상 난항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 과정에 유족에게 ‘돈을 줄 테니 사안을 종결 짓자’는 요구까지 전했다. 지난 5월 청주방송 비판 광고를 낸 대책위 활동가들에 1억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면서도 청주방송 책임은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와 관련 청주방송 경영진들도 직접 유족 자택 등을 수차례 찾아가 문구 삭제를 요구했다. 유족 이대로씨는 “조정 문제는 형이 억울해했던 잘못된 1심 판결을 알리고, 제대로 된 항소심 내용을 통해 빼앗겼던 명예를 회복하는 정말 중요한 문제”라며 “사망 책임을 부정하는 법원의 조정 결정에 대한 이의 제기를 당장 중단하고, 즉각 조정 결정을 수용하라”고 밝혔다.

▲지난 1월17일 청주방송 뉴스 리포트에 실린 이두영 두진건설 회장(청주방송 이사회 의장)
▲지난 1월17일 청주방송 뉴스 리포트에 실린 이두영 두진건설 회장(청주방송 이사회 의장)
▲지난 7월 청주방송 4층 소회의실에 조성된 고 이재학 PD 추모공간. 사진=손가영 기자
▲지난 7월 청주방송 4층 소회의실에 조성된 고 이재학 PD 추모공간. 사진=손가영 기자

 

명시적 합의 위반에 경영진 사퇴 요구까지 나온다. 대책위는 24일 성명을 내 “청주방송은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 합의를 스스로 뒤엎으며, 고 이재학 PD와 유가족은 물론 청주방송의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를 우롱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다”며 “이두영 청주방송 이사회 의장은 청주방송 경영 간섭을 중단하고, 경영진은 계속 합의안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는다면 책임지고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대책위는 “다시 대책위를 중심으로 청주방송과의 투쟁을 선포한다”며 “국정감사, 고용노동부 특별근로감독 등 모든 수단을 강구해 재차 짓밟힌 이재학 PD 명예를 회복하고, 청주방송이 기필코 4자 합의의 내용을 지킬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도 밝혔다.

다른 과제 이행을 둘러싼 시선도 곱지 않다. 사건 책임자 처벌이 중요성에 비해 속도가 더디다는 지적이다. 청주방송은 합의 1달여 후 인사위 구성을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보유한 1차 자료를 요청하고 받는 과정에 2~3주 시간이 걸렸다. 합의 후 2달째인 지난 18일 다수의 가해 직원 중 핵심 인물 1명만 인사위에 회부됐다. 

청주방송 관계자는 이와 관련 “징계는 합의 직후 비정규직 처우 개선과 공식 사과, 보상 등 다른 과제를 이행하느라 여력이 없어서 늦어졌다. 진상조사위로부터 자료를 받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며 “자료를 검토 중이다. 징계 결정과 다른 책임자들 인사위 회부 모두 신속히 추진할 예정”이라고 반박했다.

또 합의 위반 문제에 대해 “행정 용어가 이의신청이지 합의된 문구에 이의를 제기한 건 아니다. 일부 이사들이 문제제기를 계속해 시간이 좀 더 필요해 이의신청서를 냈다”며 이두영 회장의 개입과 관련해선 “전혀 관련 없다”고 밝혔다. 

대책위는 이와 관련 오는 5일 오전 11시 청주방송 사옥 앞에서 청주방송 합의 위반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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