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역배우 자매 사건’ 피해자로 알려진 고 양소라·소정씨를 기리는 11주기 추모제가 3일 열렸다. 사망 후 시민사회가 주최한 첫 추모 행사다. 이들은 “모든 여성 보조출연자들에게 안전하고 정의로운 일터를 위해 싸우겠다”고 밝혔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한빛센터)는 이날 오후 2시 유족인 어머니 장연록씨와 함께 소라·소정씨가 묻힌 경기 파주 용미리 묘역을 찾아 제사를 올렸다. 3일은 2009년 9월3일 숨진 동생 소정씨 기일이다. 언니인 소라씨는 이보다 6일 전 8월28일 숨졌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유족 장연록씨가 3일 오후 2시 고 양소라·소정씨가 묻힌 경기 파주 용미리 묘역에서 11주기 추모제를 열였다. 사진=손가영 기자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유족 장연록씨가 3일 오후 2시 고 양소라·소정씨가 묻힌 경기 파주 용미리 묘역에서 11주기 추모제를 열였다. 사진=손가영 기자

 

이 사건은 2004년 일어난 보조출연자 집단 성폭행·성추행 사건이다. 당시 보조출연으로 생활비를 벌던 소라씨가 보조출연 관리자 등 12명으로부터 피해를 입었고, 이후 사건을 수사한 경찰로부터 2차 가해를 당한 후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언니에게 보조출연일을 권해 죄책감 등에 시달리던 소정씨도 6일 후 생을 마감했다. 

유족이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묘역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장씨는 딸들의 생일과 기일, 추석이나 설날 등 명절이나 기념일마다 묘지를 찾았다. 장씨는 “매번 전단지를 가져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같이 울어 준 시민도 있었다”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여길 찾아주니 마음 깊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진재연 한빛센터 사무국장은 행사를 열며 “위계·서열 구조가 강한 방송 현장에서 권리를 갖지 못한 노동자들이 많다. 그중 여성 노동자들이 성폭력, 성희롱에 많이 노출됐지만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일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여성들이 더 많다”며 “그중에서도 소라·소정님께서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11년이 됐고, 그동안 어머니께서 굉장히 힘겹게 싸우고 계셨다”고 말했다. 

한빛센터 박희정 활동가는 “가해자를 방조하고 묵인해 사건을 반복되게 한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3년 4~6월 영화진흥위원회가 보조출연자 4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여성 응답자 101명 가운데 25명이 성희롱과 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박 활동가는 “이 사건은 불운한 개인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여성 출연자들을 향한 성폭력은 보조출연 반장들에게 일상화된 문화였다”며 “촬영장에서 보조출연 노동은 절대 갑인 반장에게 달렸다. 여성 보조출연자는 그 위계 구조 안에서도 취약한 위치에 있다”고 말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유족 장연록씨가 3일 오후 2시 고 양소라·소정씨가 묻힌 경기 파주 용미리 묘역에서 11주기 추모제를 열였다. 사진=손가영 기자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유족 장연록씨가 3일 오후 2시 고 양소라·소정씨가 묻힌 경기 파주 용미리 묘역에서 11주기 추모제를 열였다. 사진=손가영 기자

 

지난 11년 간 방송사가 무관심과 묵인으로 방조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성상민 한빛센터 활동가는 “사건이 10년 넘게 보도됐음에도 해결되긴커녕 어머니께서 지금까지도 맘 편히 쉬지 못하고 활동해야 하는 건 사건이 일어난 주요 장소인 방송사를 비롯한 미디어 자본들이 (사건을) 가십적으로, 자극적으로 다룰 뿐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진심 어린 접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성 활동가는 이어 “MBC플러스를 제외한 어떤 방송사도 이 문제에 어떤 책임을 지겠다고 공식적으로 말하거나 어떻게 재발을 방지할 것인지 명확하게 밝힌 데가 아무 곳도 없다”며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방송사에선 무엇이 변하고 있나? 오히려 방송 시청자가 줄고 있다는 이유로 (제작) 비용을 줄인다.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등한시하는 게 현실”이라고 밝혔다. “이 문제를 결코 타인의 문제, 나와 무관한 문제로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MBC플러스는 최근 유족 장씨를 만나 ‘앞으로 사건 관계자들과 업무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과거 가해자로 지목된 인사가 MBC에브리원(MBC플러스 운영채널)의 드라마 ‘연애는 귀찮지만 외로운 건 싫어!’ 보조출연 반장으로 일한 사실이 알려진 후다. 

유족 장씨는 영정 사진 앞에 앉아 추모글을 읽으며 오열했다. 장씨는 “그리운 내 보물들 신이 계시다면 1초라도 볼 수 있는 만남의 소원을 들어달라”며 “엄마가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잊어라, 잊어버려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장씨는 ‘엄마는 강하니까 원수를 갚고 20년 후에 만나자’고 한 딸의 유언을 말하며 “나는 한 가지 소원이 있다. 모든 가해자들과 2차 가해를 했던 경찰이 법정에 가는 것”이라며 “그러면 판사와는 얘기할 수 있다. 세상 어느 법정에서 ‘성인이 강간을 당하면 사건이 안 될’ 수 있느냐. 그말 하기 위해 싸우고 또 싸웠다”고 말했다. 문제의 발언은 소라씨가 경찰 고소인 조사 과정에서 수사관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장씨는 가해자들이 여전히 보조출연 업계에서 일하고, 문제 수사관도 경찰 재직 중이라고 말했다. 장씨는 이와 관련 해당 업체와 경찰서·지구대 앞에서 1인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장씨는 추모글을 읽은 후 “어떻게 이 안에 들어갈 수 있니”라며 흐느끼면서 한동안 묘지 위에 엎드렸다.

이후 한빛센터 활동가 등 참가자 8명이 절을 올린 후 추모제가 끝났다. 진 사무국장은 “2018년 (경찰의 2차 가해 관련) 경찰 내부 재조사가 있었지만 사실 제대로 된 가해자 처벌이나 진상규명은 이뤄지지 못했다”며 “한빛센터가 유족께 조금이라도 힘이 돼 드리고 싶어 앞으로 함께 싸워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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