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이라는 정체성을 가져본 적이 없다. 독일에 와서야 내가 아시안임을 깨닫는다. 백인사회에 소수 인종으로 살면서 내 존재 자체가 약자임을 인식한다.

약자성에 대처하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무시하거나 분노한다. 인종차별을 감당하거나 용인하는 수준은 개인마다 다르다. 나는 보통 무시한다. 길을 가다 칭창총(동양인 비하 용어)을 들어도, 캣콜링(지나가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남성의 휘파람 또는 성적 발언)을 들어도, 뭔가 설명하기 힘든 불친절함을 경험해도 그냥 지나친다. 그게 정신건강에 이롭다고 판단해서다. 내가 아무렇지 않다고 해서 모든 아시아인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상처를 받고 피해자가 된다. 분노하고 소리친다.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니가 예민한 거야”, “그냥 무시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또한 폭력이다. 당사자가 느낀 감정과 판단을 존중한다. 피해자의 말을 듣는 것, 약자를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다. 

샘 오취리에 가해지는 폭력을 본다. 흑인인 그가 인종차별임을 느꼈다. 그리고 말했다. “니가 뭔데”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관짝소년단’ 당사자가 아니라고 했는데, 당신이 왜 난리냐는 이야기다. 관짝소년단 코스프레가 논란이 되었을 때 관짝소년단 흑인 몇 명만 특정한 것이 아니다. 그런 행위가 흑인에 대한 차별적인 행동인가를 이야기했다. 흑인인 샘 오취리는 불쾌했고, 그것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 실제로 흑인이 어떻게 느낄지 아시아인인 우리는 도무지 알 수 없다. 흑인이 아닌 사람들은 흑인 당사자가 그렇게 느낀 것을 듣고 존중하면 될 일이다.

모두 동의하라는 말이 아니다. 모두 동의하지도 않을 것이다. 약자성을 가진 이의 말을 적어도 들으라는 의미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왜 우리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인종차별을 느꼈다는 이에게 기어코 사과를 받아내는가. 한국인끼리는 논쟁할 수 있지만 당사자인 흑인의 논쟁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감히 네가’라는 시선이 꽂힌다. 그게 인종차별이다.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한국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인 상황을 보니 독일에서 아시아인으로 싸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낀다. 코로나19 이후 독일에서는 아시아인을 향한 혐오가 더 심해졌다. 언론에서조차 ‘풍자’라는 이름의 폭력이 이어진다. 

지난 2월3일자 ‘슈피겔’이 발행한 풍자 칼럼의 일부다.

“이상한 중국인들을 오랫동안 의심해 왔다면 이제 적대감을 그냥 드러내도 되겠다. 지금은 자제하는 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 모두 곧 죽을 수 있다는 건 노란 피부의 찢어진 눈들 덕분이다. (중략) 아시아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옆에 가지 않는다 해도 놀라지 말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죽고 싶지 않으니까. 그 아시아인이 위험지역에서 왔는지는 전혀 상관없다. 왜냐하면 모든 아시아인들은 어차피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풍자처럼 들리는가? 중국인에게 한 말이니 한국인인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인가? 많은 아시아인들이 문제제기 했지만, 글을 쓴 백인 남성과 독일 언론평의회의 백인 심의위원들 모두 ‘풍자일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이것이 풍자가 아니라 폭력이라는 사실을 백인들에게 이해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도 계속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용히 있지 않겠다’는 의지다. 아시아인이 약자답게 피해자답게 아무 말 없이 있으면 이놈의 백인들은 정말 죽을 때까지 모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인종차별 의도가 없는 경우도 많다. 웃기려고 친해지려고 순수한 의도로 상처를 준다. 당사자가 끊임없이 떠들어야 하는 이유다. 

“나는 이해가 잘 안 되지만 당신이 상처받은 것은 알겠어. 그 마음을 존중해.”, “나는 웃기려고 한 건데 당신에게 상처가 되는 줄 몰랐어. 이제부터 조심할게.” 딱, 이 정도의 인식만 가지길 바란다. 독일의 백인들도, 한국의 아시아인들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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