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B청주방송에서 부당해고돼 법적으로 싸우던 비정규직은 고 이재학 PD 말고도 1명이 더 있었다. 5년 동안 운전기사 겸 촬영보조를 거쳐 MD(Master Director)로 일했던 한 ‘용역업체 직원’이다. 그는 청주방송이 자신을 부당하게 비정규직으로 썼다고 항의한 직후 계약이 일방 종료됐다. 이재학 PD 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이를 ‘불법파견’이라고 확인했다.

정윤교(가명·38)씨는 지난해 9월 청주방송이 자신을 직접 고용할 의무가 있다는 고용 의사 표시 소송을 서울북부지법에 냈다. 겉으론 인력 파견·용역(도급)업체에 고용됐으나 실상은 청주방송의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으며 정직원처럼 일했다는 주장이다. 고 이재학 PD가 2018년 9월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넣은 지 딱 1년 후다.

정씨가 청주방송에서 일한 기간은 5년 1개월 가량. 1년 8개월은 ‘파견노동자’로 일했고, 나머지 3년 4개월은 ‘용역업체에 고용된 상태’로 일했지만 달라진 건 계약서밖에 없다. 정씨는 5년 내내 한 인력파견업체에 고용돼 서류상 지위만 바꿔가며 청주방송에서 일했다. 청주방송이 필요로 하는 상시·지속 업무를 청주방송 필요에 따라 내용을 바꿔가며 일했다.

▲정윤교(가명)씨는 2013년 운전기사로 청주방송에 입사해 2015년 4월 MD로 업무를 바꿨고, 2018년 12월까지 MD로 일했다. MD일 때도 청주방송 요구에 따라 운전기사 파견을 나가기도 했다. 청주방송 운전기사는 촬영보조도 겸한다. 정씨(가장 오른쪽)가 2017년 촬영보조를 하는 모습.
▲정윤교(가명)씨는 2013년 운전기사로 청주방송에 입사해 2015년 4월 MD로 업무를 바꿨고, 2018년 12월까지 MD로 일했다. MD일 때도 청주방송 요구에 따라 운전기사 파견을 나가기도 했다. 청주방송 운전기사는 촬영보조도 겸한다. 정씨(가장 오른쪽)가 2017년 촬영보조를 하는 모습.

 

그의 5년은 크게 운전기사와 MD로 나뉜다. 운전기사로 1년 4개월, MD로 3년 9개월이다. 2013년 12월12일 기사로 입사한 그는 2015년 4월 청주방송의 요구로 업무가 바뀌었다. 청주방송 경영국장이 정직원 MD가 병가를 내 공석이라며 그에게 면접을 제안했고, 바로 다음 날 MD로 그를 투입해 일을 가르쳤다.

MD는 ’방송 운행 책임자’다. 쉽게 말해 프로그램 사이에 각종 광고나 외주 프로그램이 정시에 송출되도록 관리하는 기술인력이다. 가령 프로그램 사이 시간이 5분이면 20초, 30초, 60초 등 다양한 분량의 광고 초수를 계산해 급수(SA·A·B·C급)에 맞게 배열해 5분을 채운다. 이를 송출 프로그램 ‘리스트에 건다’고 한다. 광고·프로그램이 넘어갈 때마다 기술감독(TD)에게 ‘스탠바이’와 ‘컷’을 외친다. TD가 신호를 듣고 버튼을 누르면 광고가 화면에 송출된다.

▲MD들이 쓰는 송출용 프로그램. 목록대로 광고 및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붉은 색 내용은 광고 종류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간에 맞춰 정규직 기술감독에게 '스탠바이'와 '큐' 사인을 보낸다.
▲MD들이 쓰는 송출용 프로그램. 목록대로 광고 및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붉은 색 내용은 광고 종류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간에 맞춰 정규직 기술감독에게 '스탠바이'와 '큐' 사인을 보낸다.
▲MD가 업무를 위해 청주방송으로부터 받는 일일 광고 운행의뢰서.
▲MD가 업무를 위해 청주방송으로부터 받는 일일 광고 운행의뢰서.

 

MD가 실수하면 바로 방송사고가 난다. 방송 송출의 핵심 인력으로 지상파 3사 경우 대부분이 직접 고용한다. 청주방송은 이를 2015년경부터 서서히 외주화했다. 정씨가 MD를 시작할 때 만해도 정규직이 같이 일했다. 4명 중 2명이 정규직, 2명이 용역업체 직원이었다. 넷의 업무는 똑같았다. 5개월 후, 정직원 2명 자리도 모두 용역업체 직원으로 대체됐다.

필수 업무 맡으며 ‘1년 짜리’ 계약서 해마다 써

정씨는 4조 2교대로 일했다. 어제 오전 8시30분부터 저녁 7시까지 주간에 일하면, 오늘은 저녁 7시에 출근해 다음 날 오전 8시30분까지 야간근무를 한 뒤 남은 시간은 쉬고, 내일은 휴무를 하는 ‘주간-야간-비번-휴무’ 구조다. MD는 24시간 돌아갔다. 방송은 새벽 2시부터 4시30분 동안만 중단되는데, 정파 시간엔 ‘재난방송 모니터링’을 해야 했다.

▲2015년 4월 MD 주조종실 4조 2교대 근무표로, 푸른색 칸 안의 정아무개씨와 손아무개씨는 정규직 MD다. 정규직과 용역업체 직원이 함께 같은 일을 했다.
▲2015년 4월 MD 주조종실 4조 2교대 근무표로, 푸른색 칸 안의 정아무개씨와 손아무개씨는 정규직 MD다. 정규직과 용역업체 직원이 함께 같은 일을 했다.

 

태풍·지진 등이 나면 MD 모니터에 관련 정보가 뜬다. 재난방송을 제때 하지 않으면 방송통신위원회 제재를 받는다. MD들은 신속히 CG 자막 등을 만든다. 라디오로 송출할 음성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송출한다. 청주방송 MD는 이밖에 보도·제작팀 소관인 ‘블루레이 레코딩’ 작업과 편성팀장에게 보고할 각종 보고서 작성까지 떠안았다.

이렇게 일하고 받는 돈은 약 200만원. 각종 세금을 뺀 값이다. 기본급은 법정 최저임금에 맞췄다. 여기에 시간 외 수당과 하루 식대 ‘2500원’이 더 있다. 재난방송 수당은 원래 없었는데, MD들이 휴식시간도 없이 새벽 2~4시에도 일을 해야 하냐고 항의하자 그제서야 월 20만원씩 받게 됐다.

▲재난방송 모니터링을 맡은 MD들이 쓰는 재난방송송출클라이언트 프로그램 갈무리.
▲재난방송 모니터링을 맡은 MD들이 쓰는 재난방송송출클라이언트 프로그램 갈무리.
▲청주방송 재난방송 매뉴얼. MD는 용역업체 직원임에도 청주방송의 지휘·감독 아래 일했다는 증거 중 일부다.
▲청주방송 재난방송 매뉴얼. MD는 용역업체 직원임에도 청주방송의 지휘·감독 아래 일했다는 증거 중 일부다.

 

정씨는 ‘1년 짜리 용역 직원’이었다. 청주방송은 A인력파견업체에 MD 업무를 위탁했고, A업체는 정씨와 1년 단위 근로계약서를 해마다 썼다. 2016년 그의 근로계약서엔 “정씨는 A업체가 지정하는 근무지인 청주방송에서 일하고 정씨는 이에 동의한다”며 “정당한 사유 없이 인사명령을 불복할 땐 근무의사가 없는 걸로 보고 사직으로 정리한다”고 적혀 있다.

“나 불법 파견 아니냐” 말하자 ‘해고’

2015년은 정씨에게 ‘복잡한 해’다. 계약서를 거듭해서 다시 썼다. 정씨 의지가 아닌 청주방송 필요에 의해서였다. ‘파견직 운전기사’로 일하던 정씨에게 갑자기 MD를 시키려니 위법 소지가 발생해 청주방송과 A업체는 계약관계를 재차 조정했다.

▲정씨가 입사 2년 차 때 용역업체와 4번째로 쓴 계약서. 1년 단위로 운전기사 파견계약서를 2번 썼고, MD로 전환된 후엔 수개월 단위 '광학장비기사 파견계약서'를 썼다가 2015년 9월 '도급 사원 계약서'를 다시 썼다.
▲정씨가 입사 2년 차 때 용역업체와 4번째로 쓴 계약서. 1년 단위로 운전기사 파견계약서를 2번 썼고, MD로 전환된 후엔 수개월 단위 '광학장비기사 파견계약서'를 썼다가 2015년 9월 '도급 사원 계약서'를 다시 썼다.

 

파견노동자는 파견법이 정한 업종에만 쓸 수 있다. 파견노동 오남용을 방지하는 취지다. 운전기사는 파견법이 정한 업종이다. MD는 다르다. 파견 대상에 ‘광학 및 전자장비 기술 종사자 업무’가 허용돼 각종 촬영·방송 장비를 다루는 업종도 가능하지만 ‘보조업무’에 국한됐다. MD는 보조업무라 보기 어렵다. 

정씨는 2015년 ‘파견 운전기사’에서 ‘파견 MD’로, 다시 ‘용역 MD’로 변모했다. 2015년 4월 자신을 ‘광학장비운용기사’라고 적은 파견직 계약서를 썼다가, 9월 ‘도급 사원 근로계약서’를 다시 썼다. 계약 기간은 9월부터 12월까지였다. 그렇게 2016년 1월1일부터는 1년 짜리 ‘도급 사원 근로계약’을 해마다 쓰다 2018년 12월31일 계약이 끝났다.

정씨는 계속 일하고 싶었지만 계약은 일방 해지됐다. 그가 청주방송에 직접고용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2018년 중순, 청주방송은 노무 컨설팅을 받고 정규직화가 권고됐던 MD 직군의 한 용역업체 직원을 고용했다. 정씨 눈엔 주조종실 MD 4명 지위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정씨는 이에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업무 지시도 받아보지 못한 용역업체 관리자를 찾아서 만났다. 그리고 ‘내가 불법파견 노동자가 아니냐’고 따졌다. 정씨는 이어 청주방송 경영국을 찾아가 직접 고용 필요성을 주장했다. 모두 2018년 10월 중순의 일이다.

대체인력 채용은 쉬웠다. 청주방송은 12월13일 정씨에게 ‘직접고용은 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리고 4일 후 채용 공고를 내면서 대체 인력을 찾았다. 한 직원이 뽑혀 12월24일 MD 교육이 시작됐다. A업체와 2018년 12월31일 만료되는 계약서를 쓴 정씨는 2019년 1월1일 새 근로계약서를 쓰지 못했다.

퇴사 후 남은 건 70여장의 계약서다. 정씨는 해가 바뀔 때마다 작성한 계약서 7장 외에도 70장에 달하는 ‘단기파견계약서’를 썼다. 청주방송은 정씨가 MD일 때도 운전기사가 부족하면 그와 파견계약서를 따로 쓰고 운전을 시켰다. 정씨는 용역 직원이면서도 파견노동자였다. 이렇게 휴무에 운전기사 대타로 뛴 날이 70여일이다.

▲'용역업체 직원' MD들이 정규직 팀장들과 긴밀한 지시-보고 체계를 이뤄 일한 카카오톡 업무 기록.
▲'용역업체 직원' MD들이 정규직 팀장들과 긴밀한 지시-보고 체계를 이뤄 일한 카카오톡 업무 기록.
▲MD들이 작성해 청주방송에 보고하는 방송일지.
▲MD들이 작성해 청주방송에 보고하는 방송일지.
▲정씨는 MD를 하며 속보 CG 처리도 병행했다.
▲정씨는 MD를 하며 속보 CG 처리도 병행했다.

 

이재학 PD 억울함 지켜봤던 ‘제 2의 이재학’

이재학 PD 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정씨는 부당해고됐다. 조사 결과 MD의 불법파견 문제가 확인됐다. 업무 관계를 보면 청주방송 MD는 형식상 용역 직원이라도 실질상 ‘파견노동자’로 간주된다. 그런데 MD는 파견법이 허용하는 업무가 아니므로 파견법 위반이란 논리다.

정상적인 위탁 용역업체 직원은 업무 지휘·감독, 인사관리 등을 모두 해당 업체로부터 받고 작업 도구도 모두 용역업체 소유다. 정씨는 업무 지시를 청주방송국 편성제작국, 경영국, 기획제작국 등에서 받았고 보고도 올렸다. 그의 업무는 과거 정규직의 업무였고, 그는 정규직 기술감독과 한 조를 이뤄 일했다. A업체는 청주방송 MD 수나 인건비 등을 직접 정할 수 없다. 대법원 판례 기준에 따라 정씨는 파견노동자였다.

▲고 이재학 PD 영정사진.
▲고 이재학 PD 영정사진.

 

정씨는 운전기사로 일했을 때조차 불법파견이었다고 밝혔다. 기사를 하면서 ‘촬영보조’를 병행했기 때문이다. 가령 제작진들을 청주방송에서 음성군 촬영지로 운전해준 후 카메라 삼각대, 조명장치 등을 들고 촬영 보조를 했다. 취재대상에 마이크를 달아주는 등 오디오맨 역할도 했다. 촬영 지원 등 방송 관련 업무는 파견대상 업무가 아니다.

정씨는 자신이 일을 시작한 2013년 12월12일부터 청주방송이 자신을 직접 고용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부당해고된 2019년 1월부터 매월 300만원 상당의 금액을 손해배상으로도 청구했다.

정씨는 이재학 PD와 같은 중·고교를 나온 친구다. 그리고 이 PD가 해고된 후, 그의 소송을 도와준 몇 안 되는 청주방송 직원이었다. 그는 생전 이 PD가 억울해하는 모습과 회사의 회유와 위증, 청주방송 직원들의 외면과 험담에 힘들어 했던 모습을 지켜봤다. 정씨는 “청주방송 직원들이 조금만 더 재학이 사건을 자기 일처럼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며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란 걸 알지만 법으로 정당함을 확인받고 싶다”고 밝혔다.

 

[이재학PD 보고서 분석] 
이재학 PD, 정규직 인정 이유 차고 넘쳤다
10년 직장동료도 돌아서게 만든 청주방송의 회유와 압박
이재학PD “어떻게 저런 거짓말을” 울분 터뜨렸던 이유
이재학 PD “판사가 노동자가 뭔지 도통 모르는 것 같다”
운전기사가 촬영보조, 리포터가 편집… 청주방송 ‘비정규직 백화점’
5년 동안 계약서만 70장… 청주방송 ‘제2의 이재학’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