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트위터, 텀블러, 인스타그램, 유튜브, 카카오톡까지. 흔히 접하는 어떠한 소셜미디어도 ‘온라인 그루밍’의 통로가 될 수 있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n번방)으로 또 한번 그루밍 성폭력 심각성이 알려졌지만 이를 처벌할 법·제도가 미흡하다. 경찰·정부·시민사회 관계자들은 19일 국회에서 ‘디지털 성착취 근절을 위한 제도 개선 토론회’(더불어민주당 박완주·진선미·임종성·정춘숙·권인숙·한준호 의원실 주최)에 참석해 온라인 그루밍 성폭력 범죄화와 이를 적발하기 위한 위장수사 제도화 방안을 논의했다.

온라인 그루밍은 통상 성착취를 목적으로 아동·청소년이나 취약한 대상을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관계·행위 등을 칭한다. 그간 가해자가 교육·보호·감독이나 자문·치료 또는 종교관계에서 피해자를 통제·조정하는 사건이 주로 전해졌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에선 가해자가 랜덤채팅에서 만난 피해자 정보를 알아낸 뒤 문화상품권·기프티콘을 주면서 나체사진·영상 등을 요구하고, 피해자가 신고를 주저하는 상황에서 오프라인 성폭력에 이른 사례가 알려졌다.

피해는 아동·청소년에 집중되고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메신저·SNS·스마트폰앱을 이용한 아동·청소년 성매수 범죄는 2014년 46.1%에서 2018년 91.4%로 급증했다. 지난 3년간 청소년 10명 중 1명 이상은 인터넷에서 원치 않는 성적 유인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적 유인 경로 중에서는 SNS가 27.8%로 가장 많았고, 인스턴트 메신저 28.1%, 인터넷 게임 14.3% 순이다. 누구나 예기치 못한 곳에서 온라인 그루밍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 19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디지털 성착취 근절을 위한 제도 개선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 19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디지털 성착취 근절을 위한 제도 개선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현행법상 그루밍 특히 온라인 그루밍을 처벌할 근거는 미흡하다. 아동·청소년성보호법(제13조2항)은 “아동·청소년 성을 사기 위해 아동·청소년을 유인하거나 성을 팔도록 권유한 자는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할 뿐이다. 20대 국회에서 정춘숙·김삼화·신창현·박인숙·곽대훈 의원 등이 그루밍 성폭력을 처벌하기 위한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으나 모두 법제화하지 못하고 폐기됐다. 21대 국회 들어서는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1일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이정연 여성가족부 아동청소년성보호과장은 “성착취를 당하기 이전에 성적 목적의 유인 과정·행위를 처벌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며 “구체적이고 불법성 높은 행위를 그루밍으로 규정하는 방향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예컨대 길들이기 과정, 단계상의 ‘성적대화’, 성적인 영상물·사진 요구·제작 혹은 아동·청소년에게 송부, 유포 협박, 만남 요구·약속, 만남 등이다. ‘성적대화’의 경우 폭넓은 의미에서 성적 목적 대화를 아동·청소년에게 시도하지 못하도록 범위를 확장하되 가해자 연령을 성인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의 신고운 변호사는 △성행위를 조장·권유·강요하는 성적인 대화 △외설·음란 자료를 아동에게 노출하는 행위 △아동에게 성적 영상물·사진을 요구하는 행위 △아동과의 성행위를 목적으로 유혹·유인하는 행위(성적 만남 제안) 등을 처벌해야 할 온라인 그루밍 행위로 분류했다. 신 변호사는 “‘성적 목적’ 판단은 가해자가 신분을 속여 아동에게 접근했는지, 특별한 이유·대가 없이 선물을 제공하면서 호의를 사려고 했는지, 아동 연령에 적합하지 않은 주제로 대화를 나눴는지, 아동이 나쁜 행동을 한 후에 도망칠 수 있도록 해줘 가해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거나 가족으로부터 정서적으로 고립되도록 만들었는지, 이러한 가해자 행위들이 궁극적으로 아동과의 사이에 성적인 요소를 도입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을지 등 제반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라 말했다.

이현숙 탁틴내일 상임대표는 “온라인 그루밍은 ‘과정 자체가 가해’이며 만남 의도와 무관한 온라인 그루밍도 범죄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아동을 만나기 위한 명확한 의도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이미 아동이 그루밍을 당했거나 비접촉 온라인 성학대를 당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동을 보호하기에 ‘너무 늦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대표는 ‘전형적인 피해자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동 피해자들은 성폭력·성착취·성매매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본질적으로 같은 범죄다. 이를 굳이 구별하면 지원 과정에 어려움이 있고 범죄 성격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아동·청소년 대상 성매수는 아동·청소년 대상 성착취로 바꿔야 한다. 성매매라는 표현보다는 ‘성착취 목적의 인신매매’로 표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교육기관에서 발생하는 그루밍을 막기 위해 ‘비밀스러운 사적인 관계’를 방지하고 적발 시 징계를 제도화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일례로 미국고등학교체육연맹(NFHS)은 학생에 대한 교사·코치의 성적농담·과도한 사적대화·1대1 만남 등을 금지하는 ‘학교운동부 성폭력 예방 십계명’을 두고 있다. 이 대표는 이처럼 “아동 관련 기관에서 그루밍을 방지할 수 있는 자체 규약을 만들고 위반 시 징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그루밍이 어떤 것인지 사회적으로 합의할 수 있으며 법에 담지 않더라도 수사 재판 과정에서 고려할 수 있어 그루밍을 방지할 판례들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기업이 성착취 정황을 발견하면 경찰에 신고하고 관련 데이터를 확보하는 ‘신고의무자 조항’을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ReSET(리셋)’이 공개한 랜덤채팅앱 실태 자료 갈무리.
▲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ReSET(리셋)’이 공개한 랜덤채팅앱 실태 자료 갈무리.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ReSET(리셋)’ 재영 활동가는 “온라인에서 아동·청소년을 성적으로 착취하고자 하는 가해자들은 텔레그램이나 위커(Wickr·인스턴트 메신저)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곳에 숨어 있지 않다. 멀끔한 척을 하고 피해 아동·청소년과의 관계에 수개월 공을 들이는 가해자들 또한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런 경우 아동·청소년은 자신이 착취당하고 있는지 모를 수도 있다”며 “가해자들에 대한 선제적 단속이야말로 그루밍 방지는 물론 아동·청소년 성착취 예방에 가장 효과적 대책 중 하나”라고 밝혔다.

리셋은 구글플레이스토어를 통해 설치할 수 있는 랜덤 채팅앱 110개를 조사한 결과 모든 앱에서 성인과 아동·청소년이 연애나 성관계를 목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모임·대화방이 활성화돼 있었다고 밝혔다. 앱을 처음 실행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12개 앱에서 성매매 권유 또는 성적 메시지가 도달했다. 110개 중 91개는 만18세 이상 이용 가능 등급이었으나 실제 휴대전화 등으로 연령을 인증하는 앱은 5개에 불과했다. 대화 내용 캡처를 막아둔 경우는 29개에 그쳤다.

재영 활동가는 “아동·청소년 보호를 위해 필수적인 기술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거나 정해진 이용자 등급과 어긋나는 형태로 앱을 운영 중인 서비스 제공자들에 대해서는 단속과 제재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 촉구했다. 다만 “화면 캡쳐 금지 기능도 그루밍을 통해 전송된 이미지의 악용을 번거롭게 하는 수준에 그칠 뿐이며 인증 수단을 추가로 마련하는 것도 아동·청소년 이용을 조금 어렵게 할 뿐”이라며 “각 SNS에서 필터링·신고 제도를 강화하고 수사기관에 이용자의 개인 정보를 제공해 적절한 단속·처벌이 가능할 때 비로소 온라인 그루밍 범죄 억제에 실질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 지적했다.

가해자를 추적하는 시민단체들과 경찰 수사의 연계를 강화해달라는 요구도 나왔다. 재영 활동가는 “리셋 활동 초반 수사 반려 상황을 직접 겪은 적이 많았다. 심지어 활동가가 텔레그램 내 성착취물 유포 가해자의 계좌번호까지 알아냈음에도 실제 거래가 이뤄지지 않으면 수사가 불가능하다며 활동가에게 성착취물 구매를 요구한 경우도 있다”며 “실제 처벌을 요구할 목적으로 참고인 신분인 공익신고자가 증거 수집을 위해 범행에 가담하는 척 함정 수사를 진행한 경우 온전히 보호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고 지적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김대원 카카오 정책팀장은 “아동청소년 관련 정책을 보완하려고 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발표할 단계는 아니지만 빠르면 올 상반기 안에는 적용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사회적 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나름대로 정책 제도적 기술적으로 노력하고 있고 말씀주신 사항을 반영하려고 언제든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온라인 그루밍을 비롯한 디지털 성범죄를 적발하기 위한 ‘잠입(위장)수사’를 법적으로 규정할 필요성도 논의됐다. 지난 4월 정부는 디지털 성범죄 근절 대책 중 하나로 디지털 성착취물 탐지·적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위장수사를 디지털 성범죄 수사에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위장수사는 수사관이 신분을 가장해 수사 대상자와 접촉하거나 특정 조직 등에 잠입해 범죄 정보·증거를 수집하는 활동을 통칭한다.

최종상 경찰청 사이버수사과장은 △가입자·IP 추적이 쉽지 않은 해외 메신저나 다크웹 사용 △내부자들만 접근할 수  있는 비밀 단체 대화방 사용 △가상화폐 이용 등 최근 디지털성범죄 수법에 비춰 잠입수사(위장수사) 불가피성을 주장했다. “피해자를 신속히 파악하고 범인들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결국 위법 활동을 해야 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수사권 남용 방지 우려와 관련해서는 위장수사를 개시할 때 소속 수사부서장이 아닌 상급관서 수사부서장 승인을 받고, 수사기간을 일정 기간 정해두고 수사 목적이 달성되면 즉시 종료하며, 법에 담지 못하는 위장수사 절차·방법은 대통령령이나 부령 등 하위법령에 규정·시행한 뒤 보완해나가는 방안을 제안했다.

최 과장은 “수사를 위한 수사관의 신분 위장과 최소한의 필요한 활동들이 법률로 보장되지 않아 위장수사를 위한 수사관 활동이 위법으로 평가돼 법적 책임을 물게 될 위험성이 있다면 위장수사가 적극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주장했다.

신고운 변호사는 위장수사로 인한 2차 피해 우려를 지적했다. “신분을 지속적으로 위장하기 위해 성착취 영상물 유포를 요구받고 이를 유포하는 경우 유포된 영상물 속에는 엄연히 피해자가 존재하고 피해자에게는 새로운 유포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유포될 영상물 피해자로부터 범인 검거 목적을 명분으로 사전에 동의를 받는 경우에도 이 같은 동의는 피해자 취약성을 이용하는 것으로서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며 “새로운 피해를 발생시키는 행위는 현재 법체계 내에서 적법한 위장수사로서 허용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김한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위장수사 단일 수단만을 놓고서는 효과성도 정당성도 합의에 이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라며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근절 대의 일부로서 도입 시행될 필요성과 현실 효과가 일정 부분 인정될 수 있다면 정당성을 다투며 미루기만 할 것이 아니라 법 제도로서 수용하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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