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이 14일 기자회견을 열고 21대 국회의 원내 정당 모두가 차별금지법을 함께 발의하고 논의하자고 촉구했다. 국회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는 장혜영·류호정·이은주 의원, 배복주 젠더폭력 근절 및 차별금지법 추진위원장, 이자스민 이주민인권특별위원장, 배진교 성소수자위원장, 김서준 청소년특별위원회 집행위원, 박환수 장애인위원회 부위원장 등 정의당 관계자들과 김양숙 은평구 청소년 문화의집 센터장, 오픈리 레즈비언 김규진씨 등이 참여했다.

차별금지법은 10년 넘도록 폐기에 폐기를 거듭해왔다. 앞서 17~19대 국회에서는 발의된 차별금지법들이 번번이 입법절차에 오르지 못하고 폐기됐다. 2013년의 경우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던 의원들이 보수·개신교계 반발에 법안을 자진 철회하기도 했다. 바로 직전 20대 국회에선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법안을 준비했으나 최소 10명이라는 공동 발의자를 채우지 못해 발의조차 실패했다. 정의당은 이에 당장 법안을 내놓기보다 법안 처리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추진력을 만들어가겠다는 입장이다.

배복주 젠더폭력 근절 및 차별금지법 추진위원장은 “그동안 국회가 외면해왔던 차별금지법 입법과제를 21대 국회의원들이 책임 있게 참여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정의당은 법 제정의 추진을 위해 사회적 공론화와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노력을 할 것”이라며 “차별금지법은 우리 사회의 차별을 해소하고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기본법으로서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과 혐오를 없애기 위한 사회적 약속과 원칙, 구제에 관한 법”이라 강조했다.

▲ 정의당 차별금지법추진위원회가 1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1대 국회의 차별금지법 제정 동참을 촉구했다. 사진=정의당 제공
▲ 정의당 차별금지법추진위원회가 1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1대 국회의 차별금지법 제정 동참을 촉구했다. 사진=정의당 제공

정의당이 밝힌 차별금지법 제정안은 크게 네 가지 내용이다. △차별의 의미와 판단 기준을 명확히 하는 법 △차별금지 및 예방조치가 필요한 영역과 현장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법 △처벌보다는 보호와 권리 보장에 초점을 맞춘 법 △한국 사회 인권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는 법 등이다.

차별 금지 사유는 성별·장애·나이·국적 등 신체조건과 혼인여부와 같은 사회조건, 사상이나 정치적 의견,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및 사회적 신분 등으로 구체화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이유로 고용, 재화 용역 등 공급·이용, 교육기관 교육이나 직업훈련, 행정서비스 등 제공·이용 등에 있어 부당하게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하는 행위를 ‘차별’로 규정한다는 방침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피해자의 진정을 접수해 차별행위중단·피해원상회복·재발방지 등을 명하고 중대한 사안의 법적 소송을 지원하며, 차별행위 입증은 피해자가 아닌 상대방(가해자)이 하도록 했다. 또한 정부가 실태조사·교육훈련을 포함한 ‘차별시정기본계획’을 5년마다 수립·시행하는 조항을 포함하겠다고 정의당은 밝혔다.

법안을 대표발의할 예정인 장혜영 의원은 “정의당이 추진하는 차별금지법은 ‘우리 모두’를 보호하는 법이다. 혐오를 처벌로써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법이 아니라 모든 시민의 안전과 존엄을 위해 민주주의의 원칙을 세우고, 인권에서 물러설 수 없는 가이드라인을 설정하자는 것”이라며 “우리 모두의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위해서라도 차별금지법은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에는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에 대한 차별 금지 또한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한국에 실존하는 차별을 증언하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했다. 이자스민 이주민인권특별위원장은 지난달 미국에서 경찰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를 언급하며 “조지 플로이드는 국내에도 존재한다. 우리나라도 인종차별과 혐오는 계속되어 왔다”며 “제가 한국에 왔던 1990년대보다 나아졌다고 하지만 한국사회의 폐쇄성과 인종에 따른 배타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인종에 대한 차별은 이제 이주민가정의 2세, 3세로 대물림되기까지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1991년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비준한 한국에서 미등록 이주아동·외국인·무국적자 아동이라는 이유로 자행되는 차별, 코로나19 팬데믹 위기에 드러난 이주민 대상 차별 및 중국 동포 혐오 등을 언급했다.

이 위원장은 “우리 안의 혐오와 차별을 끝내는 데에는 여야, 좌우가 있을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 다문화위원회는 지난달 26일 정책토론회를 통해 재난지원금에서 이주민이 배제되는 문제를 시정해야 한다고 당에 제안했다. 며칠 전 미래통합당 초선 의원들이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면서 단체로 한쪽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국회에서 이제 행동으로 보여달라”며 “10년 넘게 추진되어온 차별금지법 제정이 21대 국회에서는 이뤄질 수 있도록 차별과 혐오가 종식될 수 있도록 여야가 중지를 모아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 정의당 차별금지법추진위원회가 1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1대 국회의 차별금지법 제정 동참을 촉구했다. 사진=정의당 제공
▲ 정의당 차별금지법추진위원회가 1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1대 국회의 차별금지법 제정 동참을 촉구했다. 사진=정의당 제공

김서준 청소년특별위원회 집행위원은 “흔히 청소년을 두고 ‘미래 세대’라 한다. 이 말에는 청소년의 ‘현재’가 결여되어 있다. 청소년의 목소리가 지워진 현실은 참담하다”며 “혐오 세력은 평등교육과 인권조례안을 유사 차별금지법이라 막아섰다. 수많은 청소년이 다름을 이유로 무분별한 폭력에 노출되었다. 혐오가 낳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은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마주해야 했던 모든 폭력의 해법은 정치라고 생각한다”며 “차별금지법 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한국 정치의 과제”라 말했다.

본인을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유부녀이자 오픈리(openly, 스스로 성적 지향·정체성을 드러낸 성소수자) 레즈비언이라 소개한 김규진씨는 “친척 중 독실한 교인이 많은데 명절에 내려가면 동성애자는 지옥에 가야 한다. 차별해 마땅하다는 얘기가 나오곤 했다. 그런데 막상 조카인 제가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하니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결혼식에 참여하셨다”며 “이렇듯 차별은 소수자가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걸 미처 알지 못할 때 일어난다. 그리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나도 모르게 소수자를 차별하는 것을 막아준다”고 말했다.

그는 차별금지법을 ‘마스크’에 비유했다. 김씨는 “제가 오늘 마스크를 끼고 왔다. 이 마스크는 바이러스로부터 저를 지켜주기도 하지만 남들을 저로부터 보호하기도 한다. 저도 모르게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며 “차별금지법은 우리 모두를 차별로부터 보호하고 또 우리가 알지 못한 채 누군가를 차별하는 걸 막아주는 법안이다. 우리 모두가 차별금지법이라는 마스크를 껴야만 사회가 혐오와 차별로부터 벗어나 보다 안전하고 건강하게 거듭날 수 있다”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호소했다.

정의당은 ‘막말’과 ‘소수자 혐오 발언’으로 국민을 실망시킨 국회가 신뢰를 되찾으려면 차별금지법 입법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는 한편, 정부 역할도 촉구했다. 기자회견문을 통해 정의당은 “정부에 촉구한다. 2018년에 수립한 ‘제3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추진과제로 명시한 ‘평등권 보장을 위한 차별금지 법제 정비’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수립하라. 1990년 한국 정부의 자유권 조약 비준 30년을 맞이한 2020년, 차별금지법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임을 정부가 앞장서서 선언하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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