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님(고객님)께서 문의하신 내용은 저희 게임과 관련된 문의가 아닌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상과 관련된 내용으로 파악됩니다. 로드님께서 문의하신 내용에 대하여 원하시는 답변을 드리기 어려운 점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립니다.”

글귀만 보면 평범한 고객센터의 답변에서 볼 수 있는 문구다. 그러나 이 문구가 나오기까지 무수한 폭력과 혐오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문구가 지니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해당 답변을 낳은 질문은 한국 게임계에서 약 5년여간 반복된 게임에 참여한 특정 일러스트레이터가 페미니즘과 관련된 언동이나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왜 게임에 참여하는 스태프들에 대한 ‘사상’을 묻는 것일까. 그리고 왜 이러한 것을 묻는 것일까. 그에 대한 연유를 알려면 2016년 7월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14년부터 나딕게임즈가 개발하고, ‘카드라이더’나 ‘던전앤파이터’ 등의 게임으로 잘 알려진 한국의 대형 게임 퍼블리셔 ‘넥슨’이 배급하는 게임 ‘클로저스’에는 2016년 일련의 투서가 날아들었다. 해당 게임이 업데이트를 하면서 새롭게 추가된 캐릭터 ‘티나’의 성우를 맡았던 성우 김자연이 ‘메갈리아 유저’라는 것을 드러냈고, 그러니 빨리 게임에서 퇴출하라는 압박이 담긴 반응들이었다. 이러한 반응을 드러낸 이들이 제시한 증거들은 성우 김자연이 트위터에 남긴 내용들이었다.

▲넥슨 '클로저스' 게임 캐릭터 티나.
▲넥슨 '클로저스' 게임 캐릭터 티나.

분명 성우 김자연은 여성 혐오와 차별을 반대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 동시에 자신이 성우를 맡았던 디즈니채널의 애니메이션 ‘프린세스 스타의 모험일기’(Star vs. the Forces of Evil)의 주인공 ‘스타 버터플라이’의 대사 “I don’t need a hero. I need a friend.”(나는 영웅을 원하지 않아. 나는 친구를 원해“라는 말과 함께 당시 존재하던 페이스북 페이지 ‘메갈리아4’가 후원을 위해 판매하던 티셔츠 ‘Girls Do Not Need a Prince”(소녀들은 왕자를 필요하지 않아’를 입고 찍은 모습도 올렸다.

그러나 성우 김자연이 페미니즘적 언행을 트위터에 남겼다는 것은 왜 성우 김자연을 게임에서 퇴출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애시당초 2016년은 2015년 하반기부터 서서히 일던 페미니즘에 대한 재호출 여론이 임계치에 이르러 결국 폭발한 해이다. 2015년에는 한국 인터넷 역사는 물론 페미니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가 탄생한 때이다. 원래는 다른 디시인사이드의 다른 갤러리와 다를 바 없이 여성 혐오적인 성향이 짙었던 이 커뮤니티는 이름대로 2015년 한창 메르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개설되었다. 그리고 매우 자연스럽게 본디 디시인사이드 전반이 지니던 여성 혐오적인 성향이 ‘메르스 갤러리’에 그대로 전이되었다. 특히 홍콩에서 한국 여성이 메르스로 확진되었다는 소식이 발생했을 때가 절정이었다. 자신의 감염 사실을 모르고 해외에서 메르스로 확진된 것은 이들 뿐만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한국’ ‘여성’이 메르스가 감염된 채 해외로 갔다는 것이 중요한 공격 포인트가 되었다.

하지만 인터넷 상의 여성들은 더 이상 참는 것을 거부하고 똑같이 싸우는 것을 결정했다. 여성 혐오로 점철되던 메르스 갤러리에 집단적으로 물밀 듯이 들어온 이들은 욕설로 혐오하는 이에게는 똑같이 욕설로, 조롱으로 혐오하는 이에겐 똑같이 조롱으로 되갚아 주었다. 이른바 ‘미러링’(mirroring)이 여성 혐오에 맞서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미러링’에 대해서는 당시의 평가는 물론, 2020년 현재의 평가에서도 분명 엇갈리는 요소는 존재한다. 자신들이 혐오를 받았다고 똑같이 혐오적 문구나 행위로 되갚는 것이 과연 페미니즘의 가치를 세우는 것에 있어서, 또는 전략적 차원에서 합당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 상관없이, 당시는 물론 지금도 강한 혐오가 존재하는 디시인사이드의 환경에서 ‘집단적 반발’이 일어났다는 것은 무척이나 강력한 사건이었다. 동시에 디시인사이드 운영진들이 지금껏 ‘김치녀’와 같은 혐오적 발언에 대해서는 제재를 하지 않다가, 이를 미러링으로 뒤집은 ‘김치남’ 같은 표현에 대해서는 매우 빠르게 게시물 삭제로 나섰다는 것은 같은 혐오, 비하적 표현이라도 이를 마주하는 양상이 천양지차로 다르다는 것을 입증한 모습이었다.

이후 2016년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은 오랜 시간 꾹꾹 눌러왔던 분노가 터지는 순간이었다. 단순한 묻지마 살인 사건도 아니고, 화장실에 여성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려 살해를 의도했다는 이 사건은 ‘메르스 갤러리’(이후 후신적 성격의 커뮤니티 ‘메갈리아’)로 점점 혐오에 대한 타파, 페미니즘에 대한 재호출을 요구하던 불길이 오르던 한국 사회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던졌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확신을 만든 사건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1990년 초에 한 번,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다시 한 번 한국 사회에서 활발하게 이야기되던 페미니즘은 이 시기를 즈음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쉽게 꺼트릴 수 없는 물결을 만들게 되었다.

성우 김자연은 그 흐름에 조응하는 메시지를 남긴 것이었다. ‘메르스 갤러리’의 ‘미러링’이나 ‘메갈리아’ 커뮤니티에 대한 입장은 사람마다 엇갈릴 수 있지만, 동시에 여성 차별이나 혐오에 비판적이고 새롭게 불길이 붙은 페미니즘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메갈리아’는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게다가 성우 김자연의 입장에서 자신이 주연으로 출연한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글귀와 구성이나, 메시지 모두 흡사한 문구를 담아 판매하는 후원 티셔츠에 관심이 자연스럽게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시에 성우 김자연의 행위는 김자연만이 특별히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냈다기 보다는, 이미 참을 대로 참았던 사람들이, 2015년부터 2016년 연속으로 제기되던 여성 차별적-혐오적 사건들에 분노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선택했을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이 누군가에게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길이었다. 특히 주로 남성 유저들이 유료 결제를 많이 하는 ‘헤비 유저’로서로 자리잡고 있는 게임계에서는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클로저스’를 중심으로 모인 커뮤니티에서는 성우 김자연의 트위터 내용이 퍼지자 대다수의 유저들은 성우 김자연을 ‘괘씸하다’고 표현했다. 동시에 성우 김자연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는 나딕게임즈나 넥슨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소비자들 상당수는 남성이고, 게임의 스탠스도 남성 유저들에게 중심을 맞춘 게임이 왜 남성의 요구를 무시하고 여성의 편을 드는 것을 가만히 놓아둘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러한 주장의 허약함을 지적하거나 용기를 내어 자신의 성별이 여성임을 밝히고 ‘이 게임은 남성만이 즐기는 게임이 아니다’며 문제를 지적한 이들도 소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론은 대세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논란이 불거진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나딕게임즈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성우 김자연과의 계약을 해지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대해 무수한 반대 여론이 문화예술 창작자나 팬을 중심으로 SNS를 뒤덮었다. 한창 페미니즘에 대한 물결이 널리 일던 2016년 여름, 게임을 비롯한 서브컬쳐 영역은 이러한 길을 대놓고 거부하며 탄압하겠다는 입장이 가시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클로저스’는 한국 게임계의 대형 회사인 ‘넥슨’이 유통, 배급하는 게임이기에 이러한 결정이 내리는 파장은 결코 작을 수가 없었다. 많은 이들이 넥슨과 나딕게임즈의 성우 김자연의 계약 해지를 규탄하고, 이를 취소할 것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혐오의 세력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미 성우 김자연을 퇴출시킨 것에 자신감이 붙은 덕분이었을까. 한 번의 ‘승리’를 겪은 이들은 이제는 타깃을 성우 김자연에 대한 일방적 계약 해지를 항의하는 창작자와 팬들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 창작자가 웹툰을 그리는 만화가라면 웹툰 플랫폼에, 성우 김자연처럼 게임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개발자나 일러스트레이터라면 게임 개발사나 배급사에 항의를 하여 퇴출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격에 몇몇 회사들이 화답을 하고 말았다. 특히 게임 영역에서 매우 민감하고, 신속하게 응답했다. 어찌보면 이는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퇴출 요구가 처음 불거진 영역은 게임 영역이었고, 게임 개발사나 배급사들은 자신들의 충성 고객이 더 이상 자신들이 만드는 게임에 돈을 쓰지 않는 것을 걱정했다. 동시에 어느 정도 여성의 목소리가 높거나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다른 문화 영역과 달리 게임은 실제 과금 통계로 잡히는 수치로든, 커뮤니티에서 두드러지는 모습으로든 남성의 존재가 강하게 부각된 것이 게임 회사로 하여금 이러한 혐오적 요구에 순응하도록 만든 요인이었으리라.

이후 2020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게임계는 ‘페미니즘’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행위를 빌미로 한 온갖 폭력적 요구가 일상이 되고 말았다. ‘클로저스’가 처음으로 ‘페미니즘 메시지를 밝힌 창작자를 퇴출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이후, 대다수의 게임들은 이러한 길을 매우 충실하게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라이온게임즈가 개발하고, 스마일게이트메가포트가 배급하는 게임 ‘소울워커’는 매우 빠르게 페미니즘 메시지를 남긴 일러스트레이터를 교체한뒤, 직접적으로 SNS를 통해 자신들이 ‘페미니스트를 손절했다’는 걸 자랑스러워 하는 게시물을 게시하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게임 ‘악튜러스’, ‘라그나로크 온라인’ 등으로 이름을 알린 스타 개발자 김학규는 자신이 만든 게임사 IMC게임즈와 계약을 맺고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가 ‘한국여성민우회’ 계정 같은 ‘반사회적 단체’의 계정을 팔로우했다는 이유로 문책을 했다고 스스로 알리는 일도 있었다.

비교적 중견, 대형 게임사만 이런 일을 했던 것도 아니다. 비주얼 노블(Visual Novel, 일본에서 발생한 장르로 소설과 유사한 내용을 게임의 형식으로 옮긴 장르) 게임을 주로 제작하는 소규모 게임사 ‘테일즈샵’은 페미니즘을 언급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내용을 SNS에 게시했다는 이유로 성우와 보컬을 적극적으로 교체했다고 홍보에 나섰다. 심지어는 해당 회사의 사장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게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남긴 작가를 압박하면서 트위터 계정의 삭제를 요구하고 심지어는 그의 작품까지 ‘메갈리아와 연관된 작가’라며 훼손한 것을 인터넷 커뮤니티 ‘루리웹’에 인증한 사건까지 2020년 4월에 폭로되는 일도 있었다.

그야말로 거의 모든 게임 업체가 혐오에 적극적으로 순응하고, 이를 확인한 혐오적 게임 유저들이 더욱 강력한 혐오적 요구를 주장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동시에 게임계 제단체들도 이러한 문제에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이렇다 할 비판적인 논의조차 없었다. ‘게임 중독’ 문제나 셧다운제 문제에는 매우 민감하게 반대와 규탄의 목소리를 내던 이들은 정작 5년 이상 페미니즘적인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개발자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공격을 받고 쫓겨나는 상황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의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게임개발자연대 등 소수의 단체가 반대의 목소리를 내긴 했지만, 다수의 게임 언론들은 이러한 입장을 주목하지 않았다. 게임 개발사나 배급사는 물론, 한국 게임이라는 판 전체가 혐오에 순응하고 침묵하고 있었던 셈이다.

▲온라인 게임 '로드 오브 히어로즈'.
▲온라인 게임 '로드 오브 히어로즈'.

이런 악순환 속에서 이 글의 맨 위에 나온 답변은 몇 안 되게 혐오적인 퇴출 요구를 거부하는 자세의 답변이었다. 대다수의 게임사들이 이러한 요구에 재깍재깍 순응하며 ‘빠르게 교체에 나서겠다’는 답변을 하겠다는 것과 달리 해당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자세를 남긴 것이다. 이러한 자세를 보인 게임은 2020년 3월에 출시된 모바일 게임 ‘로드 오브 히어로즈’이며, 이 게임의 개발/유통사는 ‘클로버게임즈’이다.

‘로드 오브 히어로즈’ 이전에도 혐오에 대한 거부의 자세를 보인 게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독립 모바일 게임 ‘마녀의 샘’ 시리즈의 개발 및 유통사 키위웍스, 비주얼 노블 ‘탐정뎐’을 만든 독립 게임 개발사 ‘팀 놀랑패’가 이러한 요구에 거부하는 자세를 보였지만 좀처럼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동시에 두 게임사 모두 독립 게임을 만드는 곳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자본에 민감하지 않은 게임사들만이 혐오적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는 함의를 낳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드 오브 히어로즈’의 선언은 비교적 신생 개발사여서 유저 확보가 중요한 게임임에도, 혐오적 요구에 순응하지 않고 이를 당당히 거부하는 자세를 보여도 된다는 또 하나의 선례를 남길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다.

비록 ‘로드 오브 히어로즈’의 게임성은 마냥 참신하지는 않다. 대다수 모바일 게임이 그렇듯, 지속적으로 과금을 유도하고 동시에 그러한 과금 체계가 있어야지만 생존이 가능할 수 있는 전형적 특성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 강요되었던 혐오의 움직임을 벗어나겠다는 자세는 물론, 대다수의 한국 게임이 성찰없이 지속했던 ‘여성 캐릭터에 대한 선정적 표현’ 등도 고민하는 게임 내의 자세 등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시 새로운 상을 모색하려는 모습이 ‘로드 오브 히어로즈’는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과연 ‘로드 오브 히어로즈’와 클로버게임즈는 ‘클로저스’와 나딕게임즈/넥슨이 만든 선례를 뒤집고 또 다른 선례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물론 5-6년의 세월은 결코 짧지 않고, 그동안 쌓아 올렸던 혐오의 성채를 부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쉽지 않아 보이는 일이라도 처음부터 그 위압에 굴복하여 순종하는 것과, 불합리한 모습에 제 목소리를 내며 싸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로드 오브 히어로즈’의 자세가 다른 게임사들에게도 퍼지고 언젠간 판 전반을 뒤흔들 수 있길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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