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로 합격 통보를 받은 지 한 달이 훌쩍 넘은 때였다. 첫 출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예비 입사일이었다. CJB청주방송은 나를 공채로 뽑고도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며 출근 날짜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2010년 10월 말께다.

어색한 정장을 차려입고 도착한 청주방송 1층 로비. 차가운 대리석 벽에는 대자보가 여러 장 붙어 있었다. 몸을 돌려 2층 보도국으로 가기 위해 작은 입구를 지났다. 그곳에도 심상치 않은 대자보가 걸려있었다. 청주방송 노조가 사측을 규탄하는 성명. 어떻게 신입사원 공채에서도 입사 비리를 저지를 수 있냐는 내용이었다.

훗날 여러 직원의 말을 전해 들은 바로는 1차 서류 심사에서 탈락한 지원자가 필기시험에 참석했고 최종 합격했다는 것이었다. 그 합격자 가족이 이두영 청주방송 회장 가족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이야기는 또 몇 년이 흐른 뒤에야 들었다.

청주방송에서 2010년 11월부터 2017년 4월까지 보도국 사회부 기자로 일했다. 수습기자 때였다. 조아무개 기자가 컴퓨터 게임의 폭력성에 관해 취재하고 있었다. 도움이 될까 하고 게임광인 지인에게 연락해 폭력성을 조사하고 조 기자에게 보고했다. 그는 잘했다며 취재를 더 도와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나를 회사 1층 로비 소파에 앉혔다. 이어 나에게 게임의 폭력성에 관해 직접 인터뷰해 달라고 했다.

‘비록 수습이지만, 나도 기자인데?’ 나는 전해 들은 것일뿐 게임광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상관없다며 인터뷰를 요구했다. 카메라 기자는 내 목소리와 함께 등과 신체 일부를 촬영했다. 나는 그렇게 첫 방송 데뷔를 했다. 시간이 얼마간 지난 뒤에야 그가 회장 사위라는 것을 알았다.

▲충북 청주시 청주방송 사옥. 사진=손가영 기자
▲충북 청주시 청주방송 사옥. 사진=손가영 기자

기사가 꺾이는 일이야 다반사였다. 현직 판사가 술 취해 식당 밖에서 옷 벗고 행패를 부려도 ‘킬’, 태풍으로 공장이 피해를 봐도 청주방송 주주 회사 건물이어서 ‘킬’, 공사 현장에서 인명 피해가 발생해도 주주 회사의 일이라 ‘킬’이었다. 청주방송 모기업인 두진건설 아파트는 취재 보호 지역이었다. 그 아파트에서 경찰이 용의자를 추적해 용의자가 추락 사망해도 사건은 보도되지 않았다. 대신에 청주방송 보도국 간부들은 타 언론사에 전화해 보도를 막기 바빴다.

한 번은 보도국장이 회장 지시사항이라며 기자들에게 취재를 요구했다. 내용은 아파트 건설 시 왜 비싼 비용을 들여 유물 조사를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수천 년 역사 유물 보존을 위한 법적 의무 사항인데도, 건설사를 함께 운영하는 회장은 그게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보도국 기자들은 취재를 기피했고 한 기자가 총대를 멨다. 왜 그때를 생생히 기억하냐고? 그날 해당 내용을 취재한 기자가 다른 보도와 겹쳐, 내가 그 기사 원고를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역한 기분을 참으며 녹음했다.

보도국 간부들이 같은 지시를 한 적도 있다. 하루는 절도 피해 사건을 취재하고 회사로 돌아갔다. 경찰 지구대의 안일한 민원 처리를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당시 보도국 데스크였던 이성덕 청주방송 사장이 눈감아달라고 했다. 이유인즉슨 자기 아들이 해당 지구대에서 현장학습을 해 지구대장과 잘 아는 사이라는 것. 나는 아들 권위에 무릎 꿇어야 했다.

▲ ‘청주방송 고 이재학PD 대책위’가 13일 오후 3시 충북 청주시 청주방송 사옥 앞에서 이 PD를 추모하는 집회를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 ‘청주방송 고 이재학PD 대책위’가 13일 오후 3시 충북 청주시 청주방송 사옥 앞에서 이 PD를 추모하는 집회를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나는 숨진 이재학 PD를 잘 모른다. 아마도 각층에서 가장 바쁘게 일했던 직원이었기 때문일 테다. 그의 근무 강도는 불 보듯 뻔하다. 청주방송은 비용을 아낀다며 차량 대수를 줄여 PD들은 종종 택시를 불러 촬영을 나가야 했다. 혹여 기관·단체에서 제작비라도 지원받으면 실제작비를 최대한 줄여 회사 이익으로 돌려야 했다. 그래야 기특한 직원이었다.

심지어 일부 장비는 자비로 사야 했다. 나도 내 돈 주고 노트북을 샀다. PX에서 총을 사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 꼴이다. 편집기가 부족해 ‘짬밥’이 안 되는 PD는 보도국까지 와서 핀잔을 들으며 그림을 붙였다. 그중 한 명이 이재학 PD다.

이두영 회장 발언이 사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KBS는 ‘다큐멘터리 3일'을 3일 만에 찍는데 청주방송은 뭐하느냐는 지적이었다. 황당했다. 서울 KBS가 3일 동안 다큐 한 편을 촬영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을 투입하는지 아는가. 이 회장은 의식의 흐름대로 직원에게 지시했다.

이재학 PD가 관여했다는 ‘청풍논객'이라는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JTBC ‘썰전’이 히트였다. 한 선배는 이 회장이 유사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지시했지만 몇 번을 거부하다 결국 청풍논객이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그런데 다들 꺼리던 프로그램을 왜 이재학 PD가 제작했겠는가.

▲이재학 PD가 맡았던 한 청주방송 프로그램 엔딩 크레딧에 실린 이 PD 모습.
▲이재학 PD가 맡았던 한 청주방송 프로그램 엔딩 크레딧에 실린 이 PD 모습.

청주방송 비정규직은 누가봐도 ‘핵인싸’였다

청주방송에는 또 다른 이재학 PD가 있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2012년께로 기억한다. 방송 시스템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하는 시점이었다. 보도국 카메라 기자는 아날로그 편집에서 디지털 편집 시스템으로 대전환을 해야 했다. 그때 카메라 기자 5~6명의 선생 역할을 했던 이가 비정규직 뉴스 PD였다.

편집 때 에러가 나면 비정규직 PD가 나서서 시범을 보여주고 편집 방법까지 전수했다. 해결사였다. 당시 그가 없었다면 방송 사고가 숱하게 났을 것이다. 그는 일이 늘어 뉴스 타이틀도 만들고 단신 뉴스도 편집했다. 누가 봐도 보도국 내 ‘핵인싸’였다. 모두 그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근무하는 7년 동안 그는 비정규직이었다.

왜 이재학 PD의 목소리는 청주방송에서 ‘이빨’이 먹히지 않았을까. 그곳도 하나의 세계다. 부서별 이해관계가 늘 첨예하게 부딪힌다. 비정규직 처우 개선에 대한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니나 조합원 요구사항을 추리다 보면 제일 먼저 탈락하는 것이 소수자 목소리다.

사내 정치도 있다. 경영도 힘들다. 회장은 조회 때마다 경영이 힘들다며 인상을 쓰고 푸념한다. 보도국 취재기자는 체면을 팔아가며 청주방송 주최 콘서트 표를 팔고 카메라 기자는 특정 날마다 회장이 다니는 종교시설, 기부 행사장, 골프대회에 참석해 그와 그의 아내를 카메라에 담아야 했다. 시간을 못 맞춰 제대로 못 찍으면 보도국장에게 핀잔을 들었다. 그건 용납 못할 낙종이었다.

▲13일 고 이재학 PD 100일 추모제에서 상영된 추모 영상 갈무리. 문구는 이재학 PD가 생전 직접 쓴 글의 일부다. 제작=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13일 고 이재학 PD 100일 추모제에서 상영된 추모 영상 갈무리. 문구는 이재학 PD가 생전 직접 쓴 글의 일부다. 제작=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시민단체에서 주장하는 지역 방송의 공공성 회복, 방송 사유화 주장이 왜 공염불처럼 들리는지 아는가. 열악한 지역 방송국에서 사주는 대통령보다 강력한 권한을 휘두른다. 입법, 행정, 사법권 모두 가지고 있다. 직접 행사하지는 않지만 임명한 직책 간부를 통해서 행사한다. 청주방송 개혁은 노예 해방보다 어렵다.

6년 이상 근무했던 때다. 시청자위원회 회식이 끝나고 이 회장과 시청자위원들, 보도국 간부들이 노래주점을 갔다. 나도 억지춘향으로 참석했다. 술잔이 도는 속도보다 시청자 위원들과 보도국 간부의 이 회장을 향한 아부가 더 빨리 돌았다. 순서를 바꿔가며 노래도 불렀다.

자리가 파할 무렵 이 회장이 못 이기는 척 마이크를 잡았다. 갑자기 보도국 간부들이 의자에서 일어나 맨바닥에 철퍼덕 앉아 해병대 손뼉을 쳤다. 그러면서 “회장님께서 술자리에 잘 참석 안 하시는데 이렇게 오셔서 노래를 부르신다”며 낯간지러운 말을 쏟아냈다. 그날 이 회장이 부른 노래는 트로트 ‘안동역에서’였다. 나는 지금도 그 노래가 지역 저널리즘의 장송곡으로 들린다.

이재학 PD는 죽기 전 청주방송 직원에게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안녕하십니까? 청주방송에서 ‘무늬만 프리랜서’ PD였던 이재학입니다. 대다수의 선배, 동료분들께서 아시다시피, 현재 소송 중이어서 이렇게 글로 인사드림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불편해하실 분들이 계심을 잘 알기에 개인적인 연락도, 안부 인사도 드리지 못함을 다시 한 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뭐가 그렇게 죄송하고 또 죄송할까. 이 PD, 미안할 것 하나도 없다. 이제 당신을 추모하는 시민들이 조연출, 작가, 출연자가 돼 당신의 디렉션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은 어떤 그림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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