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다. (중략) 억울해 미치겠다.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 왜 그런데 부정하고 거짓을 말하나.”

십수 년 정직원처럼 일하다 하루 아침에 부당해고됐다며 CJB청주방송(대표 이두영)과 법적 다툼을 벌였던 한 프리랜서 PD가 “억울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2004년 청주방송에 입사해 14여년 간 일했던 고 이재학(38) PD는 지난 4일 저녁 8시께 충북 청주시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 지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사촌 동생과 매형이 이 PD를 처음 발견했다. 이들은 이 PD의 부모로부터 ‘오전부터 연락이 두절됐다’는 얘길 듣고 이 PD를 수소문했다. 저녁께 들린 그의 집에서 유서를 발견한 직후 경찰에 신고해 위치를 추적했다.

▲고 이재학 PD 빈소 입구. 사진=손가영 기자
▲고 이재학 PD 빈소 입구. 사진=손가영 기자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다”고 시작한 유서엔 억울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이 PD는 “눈 뜨는 게 힘들고 괴롭다.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다. 억울해 미치겠다.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을까”라며 “왜 그런데 부정하고 거짓을 말하나”라고 썼다. 그는 또 “정말 내 친동생같았던 친구에게도 뒤통수를 맞았다. 아프고 힘들다. 억울하다”며 “그리고 미안하다. 미안해. 엄마 아빠 건강히 계세요”라고 적었다.

이 PD는 지난 1년 6개월여간 전 직장 청주방송과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으로 다퉜다. 그의 지위는 ‘프리랜서’였으나 관련 계약서를 쓴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는 14년 간 조연출, 연출, 각종 행정업무를 맡으며 실질적인 노동자로 근무했다고 밝혔다. 낮은 임금 등 열악한 처우를 견디며 일하던 2018년 4월 이 PD는 하아무개 기획제작국장에 ‘회당 지급되는 인건비가 너무 적으니 인상해달라’고 요구했다. 직후 이 PD는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당했다. 이 PD가 부당해고라며 그해 8월 민사소송을 제기한 이유다.

[ 관련기사 : ‘임금인상’ 말했다 쫓겨난 청주방송 ‘14년차’ 프리랜서 ]

이 PD는 소송 과정에서 “2004년 조연출로 입사해 2010년부터 연출 PD를 맡았다. 정규직 PD와 근무형태와 보고·지시 체계가 동일했다. 프로그램 최종 검수·송출부터 출연진 섭외, 프로그램 구성·촬영·편집, 중계차 디렉팅 업무까지 책임졌다. 매일 국장에게 업무보고도 했고 지시도 받았다. 내근일 때는 매일 오전 8시30분 전에 출근해 6시 이후 퇴근했고 매주 5~7일 일했다”고 주장했다.

▲ 유서. 디자인=이우림 기자.
▲ 유서. 디자인=이우림 기자.

이 PD는 지난 22일 패소했다. 청주지법 민사6단독 정선오 판사는 ‘원고(이 PD)는 오랫동안 AD로 일했고, 근무형태는 정규직과 달리 특정 시간 및 장소에 출퇴근할 의무가 없었고, 회사는 그의 근태를 관리하거나 징계 등으로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청주방송으로부터 지휘·감독을 받은 건 사실이나 부수적 업무 범위 내의 것으로 보일 뿐’이라고 판단했다. 청주방송 측 주장이 대부분 받아들여진 것.

이 PD의 친구 A씨는 “재학이가 ‘회사 쪽 증인이 나와서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한다’며 여러 차례 토로했다”고 말했다. 이 PD는 자신에게 수시로 업무보고를 받고 지시를 한 기획제작국 간부가 법정에서 정반대로 말했다고 지인들에게 밝혔다.

그가 자신의 노동자성을 입증할 증거를 모으는 덴 한계가 있었다. 이 PD는 용기를 내 준 동료의 증언에 기댔다. 동료 직원 3명이 ‘이재학 PD는 정규직 PD와 다를 바 없이 일했고, 인건비 인상을 요구하다 부당하게 실직했다’는 취지의 진술서를 썼지만 법정에 증인으로 나오진 않아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지난해 7월 이 PD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회사가 진술서를 낸 직원들에게 전방위로 압박을 가하고 있다. 당사자들이 두려워한다. 이 진술서가 없으면 나는 너무나 불리하다. 그러나 이런 말 조차 밖으로 새어 나가면 그들이 더 힘들어지니 부디 기사엔 쓰지 말아달라”고 여러 차례 토로했다.

그는 1심 선고 직전 지인들에게 ‘승소할 것 같다’는 카카오톡을 보내기도 했다. 지난 22일 선고가 난 직후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선 “판사가 노동이 뭔지, 노동자가 뭔지 도통 이해를 못하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항소 여부를 고민하던 그에게 A씨는 ‘1년 반이나 싸웠고 네 주장은 정당한데 고민할 게 뭐가 있느냐’고 조언했다. 지난달 30일 이 PD는 항소장을 냈다.

유족은 이 PD의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라고 비통해 하고 있다. 5일 청주의료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유족 B씨는 “억울하고 애통하다. 청와대를 찾아가든 어디에 글을 올리든 무엇이라도 하고 싶다.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순 없다. 청주방송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PD는 청주방송의 한 간부가 법정에서 허위증언을 했다고 평소 말해왔다. 해당 간부는 5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내가 답을 할 순 없다. 휴가 중”이라고 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이두영 청주방송 회장은 “나는 최종책임자가 아니다. 대표이사 이사회의 의장이다. 내가 무슨 청주방송을 관리감독하느냐”며 “(청주방송) 사장한테 전화해라. 나는 청주방송에 근무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윤아무개 경영기획국장은 회사 측 허위 증언 주장에 대해 “공판에 절반 정도는 참석해서 양쪽 주장을 다 들었는데, (청주방송 주장을) 거짓말로 볼 근거는 전혀 없다. 1심 판결문 내용이 청주방송의 입장이다. 1심 재판부는 근로자 지위를 입증할 책임은 원고에 있는데 원고 증거만으론 원고를 근로자로 보기 부족하다고 했다”고 말했다.

윤 국장은 이어 “청주방송 간부를 포함해 모두가 충격이 크다. 유족을 어떻게 찾아가서 위로를 해야 하는지, 불쑥 찾아가면 더 억장이 무너지는 상황을 심화시키진 않을지 고민을 하고 있고 회의를 해 공식 입장을 전하겠다”고 밝혔다. 윤 국장은 재판과 관련 “법리를 떠나서 도의적인 부분에서 (유족에게) 정말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다. 유족을 만나 뵙고 회사 입장을 전달하고 겸허히 유족 입장을 듣겠다”고 말했다.

고 이재학 PD 빈소는 청주의료원 장례식장 6호실이다. 발인은 6일 오전 9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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