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라는 직종을 비하하는 욕인 ‘기레기’는 세월호 참사 이후 널리 쓰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전에도 이 말은 별 차이 없는 속보 경쟁, 짜깁기 기사 양산, 선정적 제목 달기 등 질 낮은 기사를 양산하는 기자들을 향한 비난으로 쓰였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이 욕설이 더 많은 기자들을 향한 이유는 질 낮은 기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해 말 방송기자연합회는 참사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의 회고와 반성을 담은 보고서 <세월호 보도, 저널리즘의 침몰>을 내놓았다. 여기서 기자들이 고백한 보도 참사는 ‘사실 확인 부족·받아쓰기 보도’, ‘비윤리적·자극적·선정적 보도’, ‘권력편향적 보도’, ‘본질 희석 보도’, ‘누락·축소 보도’ 등 다섯 가지 유형이었다. 기레기는 단순한 보도 평가 아니라 기사 취재와 작성 과정을 향한 비난을 통해 확장된 셈이다. 여기에 이후 이 말은 기자 개인의 일탈 행동이나 익숙한 취재 관행의 고집, 독자를 낮춰 보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기자라는 직종 전체를 향한 혐오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 2014년 5월10일 검은티행동 참가자 일부가 서울 중구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국민의 보도지침’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2014년 5월10일 검은티행동 참가자 일부가 서울 중구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국민의 보도지침’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그러나 기자에 대한 독자의 혐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네이버앱의 ‘검색차트’나 다음앱의 ‘랭킹’ 메뉴를 보면 실시간으로 이용자들이 가장 많이 본 뉴스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뉴스 중 탐사 기획이나 심층 보도를 찾기란 정말 어렵다. 연말이면 숱하게 열리는 언론 관련 각종 시상식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기사가 높은 조회수를 보인 경우는 많지 않다. 심지어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2014년 12월, 60여명의 선원이 탄 오룡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에서는 두 연예인의 결혼소식이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튜브 전성시대라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특정 정치인의 발언과 행위에 대한 맥락과 의미를 분석하는 기사보다 그 정치인이 직접 말하는 유튜브 채널의 조회수가 압도적으로 높다. 지난 몇 년 간 언론개혁에 최선을 다했던 언론사 노조 지부장은 한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역 언론에도 탐사보도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누구도 읽지 않습니다.” 독자, 혹은 이용자에 대한 기자의 절망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언론의 진정한 위기는 기자를 향한 독자의 혐오와 독자를 향한 기자의 절망이 만날 때다. 그러나 지금 서로가 혐오하고 절망하는 대상을 제대로 마주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누가 기레기인가’라고 물으면 특정 기자를 떠올리는 경우는 많지 않다. 기레기는 포털과 소셜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속보와 단독 경쟁, 출입처 등에서 양산한 기사 등 언론 적폐의 현상을 기자라는 집단에 투영했기 때문이다. 좋은 기사를 읽지 않는 독자는 어떤가. 정확히 말하면 독자가 아닌 인터넷 이용자의 다양한 행위 중 오직 조회수라는 양적 지표만으로 독자를 평가한 결과다. 결국 기레기나 조회수 모두 뚜렷한 대상이 아닌 기자와 독자라는 집단의 일부 속성을 확대하여 일반화한 표현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 지난 2014년 3월 미디어오늘 만평. 만평=권범철 만평작가
▲ 지난 2014년 3월 미디어오늘 만평. 만평=권범철 만평작가

[ 관련 기사 : 한겨레) 강준만 칼럼-‘기레기’라고 욕하는 당신께 ]
[ 관련 기사 : 강준만 교수 “해장국 언론 원하는 사회에선 언론개혁 불가능” ]

얼마 전 강준만 교수가 “나의 속을 후련하게 만들어주는 해장국 언론을 열망하는 수용자”에게 쓴 칼럼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다. 언론개혁 과제를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용자의 문제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수용자 또한 조회수의 이용자처럼 메두사와 같이 수많은 머리를 가진 ‘다중’의 일면일 수도 있다. 도리어 칼럼에서 인상적인 표현은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기레기를 향한 혐오와 조회수에서 느끼는 절망은 기자와 독자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글로 먹고 사는 오래된 직업의 종사자가 불안한 생계로 먹고 살기 빠듯한 시민을 글자와 숫자로 만날 뿐이다. 갈수록 벌어지는 혐오와 절망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기자와 독자라는 명찰을 떼고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는 것. “당신 못지 않게 선량한 국민”으로 만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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