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1335개의 묘비명이었다. 11월 21일 경향신문 1면을 보았을 때, 눈을 몇 차례 비볐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1호선 지하철역 신문 가판대가 아니라 거대한 공동묘지에 끝도 없이 늘어선 묘비들의 사잇길 같았기 때문이다. 익명의 성씨와 나이, 다섯 가지로 분류된 사고원인이 빼곡히 채워진 묘비들 사이로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라는 조사(弔辭)만이 읽혔다. 퇴근이란 말조차 어울리지 않았다. 세상이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때만 존재한다면 “오늘도 세상이 세 번 사라졌다”고 해야 맞다. 공포와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를 가장 두렵게 한 것은 김훈 작가가 말했던 빼곡한 활자 뒤 “멀리 숨어있는 강력한 편집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기호 뒤에 숨어있는 고용주와 업체, 바로 자본의 이름이었다. 

▲ 11월21일 경향신문 1면
▲ 11월21일 경향신문 1면

 

지면이 모자라서였을까. 한 사람의 이름 옆에 그가 일했던 작업장이나 기업의 명칭은 없었다. 다만 인터넷 인터랙티브판에서는 아이콘을 클릭하면 직접적인 사고원인과 작업을 지시한 원·하청 업체명을 찾을 수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숨어있는 이름들. 이들을 향해 1335명의 동료와 가족 중 과연 몇 명이나 사고원인과 책임을 물었을까. 노동조합이나 사회단체가 진상규명위원회 등을 구성한 경우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안전설비가 없었다거나 사전 위험평가를 실시하지 않았다는 한두 줄의 사고원인, 그리고 시정명령이나 과태료 조치로 종료된 사고가 부지기수다.

[ 참고 : 경향신문 인터랙티브=‘매일, 김용균이 있었다’ 인터랙티브 홈페이지 ]

1335명의 이름으로 채워진 신문의 1면은 그 자체로 죽음의 이유를 묻고 있다. 이유는 원인과 다르다. 사고원인이 죽음의 직접적인 요인이라면, 이유는 왜 그렇게 안전설비가 부실했는지, 왜 위험평가를 실시하지 않았는지, 왜 현장에 두 명 이상이 배치되지 않았는지의 물음이다. 이런 물음은 노동자의 몫이었다. 현장에서 사고가 났을 때, 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계획과 조사를 요구하고 책임 소재와 대책을 묻는 이들은 늘 노동자였다. 개인의 부주의와 실수라는 책임까지 감내하면서도 회사의 이미지를 고려하고 원청과의 계약 연장을 염두에 두며 어렵게 어렵게 요구를 꺼낸 이들이 바로 노동자였다.

▲ 경향신문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 인터랙티브 홈페이지 갈무리.
▲ 경향신문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 인터랙티브 홈페이지 갈무리.

 

죽음의 이유를 묻는 노동자와 대답을 미루는 자본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자본뿐 아니라 이를 중재한다는 정부에 대한 이해까지 노동자에게 떠넘긴다. 이들이 왜 사고의 이유를 밝히기 주저하는지, 왜 책임을 떠넘기는지, 왜 조사와 처벌을 미루는지에 대한 숱한 짐작과 추론의 노고는 오롯이 노동자의 몫이다. 고도로 분업화된 노동, 원하청 관계가 복잡한 업계, 글로벌 경쟁 체제에 들어선 산업 부문일수록 고립된 직무에 종사하는 노동자에게 이러한 이해는 힘겹기만 하다. 그래서 하루에 세 개의 세상이 사라지는 한국 사회에서 죽음의 이유를 묻다 보면 어느새 4차 산업혁명, 국가 경쟁력, 경제성장이라는 명분에 묻히기 일쑤다.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라는 공약을 선언했던 지금의 정부도 다르지 않다. 

11월21일 경향신문의 1면은 그래서 더욱 두려웠다. 1335명의 이름은 지금 살아남은 우리에게 죽음의 이유를 묻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 물음에 답해야 할 또 다른 이름들은 숨겨져 있다. 김훈은 이 이름들을 보고 “무력한 글”보다 “통곡”을 택했다. 그러나 무력한 글이 해야 할 단 하나의 책임이 있다. 1335명의 이름 뒤에 숨어있는 이들을 호명하는 것이다. 다시 1면을 이름으로 채워야 한다면, 그때는 노동자의 이름이 아니라 책임져야 할 이들의 이름으로 채울 수 있도록.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