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명작을 볼 때 우리는 그 명작에 거의 질문하지 않는다. 교육을 통해 그 명작이 얼마나 대단하고 아름다운지 학습한 상태로 만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동하는 건 두 눈으로 명작을 실제 접한다는 설렘과 경험 아닐까.

그런데 명작이라고 배운 작품들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남성인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피에타’에 성모 마리아는 지나치게 젊다. 자식이 죽었는데 성모 마리아는 최대한 절제된 슬픔을 보여준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들은 대개 오열하며 이름을 부르고 사무치는 그리움과 슬픔에 못 이겨 쓰러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피에타’의 성모 마리아는 왜 저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울까?

여성화가 케테 콜비츠가 그린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은 ‘피에타’와 확실히 차이가 있다. 이 작품은 자식 잃은 자가 보여주는 처절한 통곡과 슬픔을 보여주는데 축 늘어진 아이를 껴안은 어미의 모습에서 자식의 죽음이 부모에게 얼마나 큰 슬픔인지 금세 수긍이 간다.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조각한 작품 ‘피에타’(왼쪽)와 케테 콜비츠가 그린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조각한 작품 ‘피에타’(왼쪽)와 케테 콜비츠가 그린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

 

작가의 성별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흔히 남자는 스케일이 큰 작품을, 여자는 작고 섬세한 작품을 만든다는 선입견이 있지만 이는 전통적 교육이 만든 하나의 프레임일 뿐이다. 작가의 성별에 따라 서로 다른 경험을 하면서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다를 수는 있지만 단순히 생물학에서 비롯된 차이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서양 미술관을 돌아다녀보면 수많은 여성 누드를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그리스 신화 속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다. 그녀는 툭 하면 잠 자거나 거울을 보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서양 사회의 관음증 문화가 ‘잠자는 여자’를 만들었다. 아프로디테는 한 손은 음부를 가려 정숙한 여성임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 손은 머리 뒤로 둘러 몸매의 윤곽선을 강조한다. 신분 높은 여인들은 이런 그림의 모델이 될 수 없어 모델 대부분은 그림 주문자나 화가의 정부나 거리의 여성이었다. 여성의 알몸을 보고 싶어 하면서 검열은 피하려 한 사람들을 위해 ‘아프로디테’라는 신화의 옷을 입혀놓았다. 

화가들은 잠자는 모습과 함께 거울 보는 아프로디테를 많이 그렸는데 그녀는 늘 거울 앞에서 몸치장에 공을 들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소년의 아름다움은 자연스럽고 여성의 아름다움은 인위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육체가 아름다우면 정신이 반듯하고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봤다. 그러나 여성은 육체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남자 보다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지적으로 열등해 외양의 아름다움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봤다. 이런 여성의 모습을 아프로디테로 드러냈다. 그래서 여성은 존재가 추하니 외양을 꾸며야 겨우 아름다울 수 있다고 봤다. 

물론 남자도 거울을 본다. 하지만 남자가 거울을 보는 건 ‘명상’과 ‘자기성찰’로 여겼고, 여성이 거울을 보는 건 ‘사치’와 ‘허영’으로 봤다. 거울을 보는 행위 만으로도 여성을 폄하하려는 프레임에서 우리도 자유로울 수 없다. 

▲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 / 조이한 지음 / 한겨레출판 펴냄
▲ 당신이 아름답지 않다는 거짓말 / 조이한 지음 / 한겨레출판 펴냄

 

우리가 명작이라고 불리는 예술 작품들은 강자(흔히 남성들)의 지배 프레임을 강화시키려고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표현한 작품이 많다. 불편한 진실을 담은 명작을 볼 때 무비판적으로 ‘아름답다’고만 외치지 말고 비틀고 해부하는 시선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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